구구절절 마음 전하는 '쓰는 편지'
구구절절 마음 전하는 '쓰는 편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0.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며칠 전 시집간 제자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녀석은 졸업을 하자마자 결혼을 했기 때문에 평균 결혼 연령에 비해서는 이른 감이 있는 결정이었다. 전공을 살려 사회 경험이라도 좀 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얼른 애 키워놓고 하고 싶은 일 하겠다는 어른스런 포부를 밝혀서 그냥 아쉬움을 접었다. 그렇게 당차게 얘기하던 녀석의 결혼이 엇그제 같은데 벌써 예쁜 첫 딸이 엄마를 부를 정도로 세월이 흘러버렸다.

편지는 가정을 꾸려나가는 주부로서의 힘겨움이며 아이를 키우면서 겪게되는 황망하고 번거로운 일상이 그대로 베어나 있었다. 서너 줄 쓰다가 아기가 보채면 달래다가 아기가 잠잠해지면 다시 펜을 쥐고, 그러기를 몇 번이나 거듭한 끝에 두 장이나 되는 긴 편지를 쓴 모양이었다. 1인 몇역을 해내야 하는 고단한 일상들을 슬기롭게 극복하기에는 아직은 어린 나이여서 인지 꿈과 현실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시간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녀석의 편지를 읽고 또 읽고 하다가 오프라인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치웠다는 작가 김영하를 떠올렸다. 인터넷 중독증 증세까지 보였던 김영하는 오프라인을 선언한 후 조급증을 치유하고 안정된 창작 생활을 얻게 되었다는 고백을 읽은 적이 있다. 만약 이메일을 통해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면 그만큼의 애틋함이나 감동을 받았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어제였다. 목포에 갈 일이 있어 모처럼 제자들과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생맥주를 들이켰다. 목포에 가면 늘 들르는 곳이 있다. 삼·사십대를 위한 공간이라고나 할까? 여느 라이브 호프집과는 달리 5인조나 되는 포크그룹이 노래를 들려주는 곳이다. 보통 라이브호프 하면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그 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게 일반적인데 그곳은 촌스런 드럼과 기타를 고집하며 7·80년대를 향수하게 하는 노래를 손님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다.

그 라이브 호프집에서 나는 문득 제자의 편지를 떠올렸다. 녀석의 편지에서 잘못 쓴 글자 위에 화이트로 지우고 덕지덕지 지운 자국에서까지도 마음을 전하려는 절실함이 베어나듯, 더러 북을 잘 못 때려 리듬이 엉키는 5인조 밴드의 수공업적인 미숙함이 깔끔한 노래방 기계에 맞추어 멋드러지게 부르는 노래보다 오히려 더 감동적이었기 때문었다.

바다저편 세균테러에 편지 이용한다니 경악

미국에서 발생한 탄저균을 이용한 이른바 세균테러가 우리들의 일상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흰색가루 공포증이라고나 할까? 광주에서까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일이 있었는 모양이다. 그런데 탄저병 세균을 퍼트린 수단으로 편지를 이용한다는 게 나로서는 무척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제 어버이날 아이들의 "사랑해요. 엄마, 아빠!"라고 게발세발 써서 보낸 편지조차도 혹시하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야하지 않을지. 혹은 잊고 지내던 벗이나 제자들의 이름이 적힌 편지조차도 선뜻 개봉을 망설이지나 않게 될지. 세균테러로 인해 이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이메일이 더욱더 종이 편지의 영역을 잠식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치는 편지를 통해 전해오는 소식이나 인사에 아무리 구구절절 절실한 마음을 담은들 어디 쓰는 편지만 하겠는가.
세기초 저 군산복합의 망령이 배회하는 바다 저편의 끔찍한 행태들이 우리들의 가슴 저리게 하는 살풋한 소통조차도 앗아가 버리는 것은 아닌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