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전남대학교-과연 '민족전대'인가
14.전남대학교-과연 '민족전대'인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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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가 '공통필수'인 대학?

내년으로 개교 50주년을 맞는 전남대학교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중 하나다. 지금이야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고, 특히 전국에서도 캠퍼스가 아름다운 대학중의 하나로 꼽히는 전남대지만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비만 오면 질컥질컥한 황토길로 인해 신발을 망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1952년 6월1일 개교한 전남대는 일제때 고등교육 기회를 박탈당하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인재가 희생되면서 고급인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정부가 각 지방에 국립 종합대학 설립을 서두르자 지역민들이 설립기성회(회장 박철수 전남지사)를 만들어 기금을 모금하는 등 노력한 결실이었다.

그러나 개교당시부터 오늘날과 같은 대학의 면모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도립인 광주의과대학, 광주농과대학, 목포상과대학과 사립 대성학원(문과대학)을 이관, 개편하고 공과대학을 신설해 5개 단과대학으로 출범했는데 농과대학만 현재 단과대학 위치에 있었고 상과대학은 목포에 있었으며 대학본부와 문과대학, 공과대학은 지금의 학동에 자리잡았던 의과대학 주변에 낡고 폐기직전의 건물에 들어선 것.

인재양성 지역민 기금 모아 1952년 개교
허허벌판 캠퍼스 60년대 들어 대학면모 갖춰
중흥 신안 운암동 등 주변지역 주택가로 개발

90년대초 한때 이전추진했다 유야무야
"도심형 캠퍼스 지역민에 좀더 개방을"지적도

자연스럽게 종합캠퍼스의 확보와 교사신축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장소 물색 결과 지금의 위치가 결정된 것이다. 당시에는 광주사범학교 부지와 화순 너릿재 부근 등도 후보지로 거론됐지만 농과대학이 자리잡고 있던 현재의 위치가 넓고 저렴한 가격에 부지를 매입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광산군 서방면 용봉동이었던 현재의 위치는 농과대학 자리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논과 밭이었다. 때문에 학생들이나 교직원 모두 초창기에는 여느 시골 초등학교 처럼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야 등교할 정도였다.

하지만 전남대는 그 허허벌판에서 건물신축에 앞서 지금의 공대 인근에 벽돌공장을 가장 먼저 지어 벽돌의 자급자족체제를 갖추고 교사 건설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 1960년대 초반에는 당시 지방종합대학 가운데 문교부에서 정한 대학설치기준령에 가장 근접한 평가를 받았다. 이같은 결과는 초대 총장을 역임한 최상채 박사의 집념과 강력한 리더십, 학교개교 당시 설립된 기성회의 후신인 후원재단 등 지역민들의 지원이 뒷받침됐다는 분석이다.

전남대가 오늘날과 같은 대학의 면모를 갖춰오면서 주변지역도 함께 개발되게 된다. 바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그것이다.

사실 전남대를 중심으로 사방에 들어선 주택가는 60년대말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제4·5·7·11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의해 기반이 닦아진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9년부터 75년까지 시행된 4지구는 중흥·신안·광천·운암동 일대로 전남대 정문 4거리에서 제1순환도로를 따라 운암주공아파트에 이르는 지역이며, 5지구는 76년부터 77년까지 시행된 사업으로 북구청 앞에서 문화초등학교 부근 일대다. 또 7지구와 11지구는 각각 84년부터 87년까지와 92년부터 96년까지 개발된 곳으로 전남대 상대와 농대 뒤편에서 비엔날레 지구 인근 일대로 모두 허허벌판에서 주택가로 변한 곳이다.

이같은 '상전벽해'가 이뤄지자 전남대는 90년들어 학교이전사업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30만평의 부지지만 주택가로 둘러쌓여 더 이상 뻗어나갈 수 없다는 점과 첨단과학연구 증진과 산학연계차원에서 광주시 본촌동 첨단단지내에 100만평 규모의 새로운 캠퍼스로 2001년까지 이전한다는 계획이었다. 이같은 안에 대해 당시 교수 교직원 학생 1천82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65%가 찬성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이후 학교이전은 유야무야 됐다.

이에대해 당시 학교이전사업 실무책임을 맡았던 송인성 교수(지역개발학과)는 "이전사업이 무산되는 과정은 학교당국에서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 배경은 정확히는 모르겠다"면서도 "이전사업이 10년계획으로 추진된 것인데 정부부처와 협의과정에서 예산상의 문제, 총장이 바뀌면서 연속성의 문제, 일부나마 교수와 학생들의 반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전남대는 기존의 부지에 새로운 건물을 신축, 부족한 시설을 보완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남대는 과거 보다 더 많은 담장을 만들고 사람과 차량을 통제하는 등 도심형 캠퍼스답지 않게 폐쇄적으로 돼가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사회교육원 개설 등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는 대학을 만들겠다는 구상과는 다소 상반된 모습이다.

과거 논밭 한 가운데에 교외형 캠퍼스가 아니라 이왕 주택가로 둘러쌓인 도심형 캠퍼스로 머물 수밖에 없다면 담장을 허물고 캠퍼스를 지역민들에게 개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대학 본연의 기능인 연구 및 교육환경을 존중하는 성숙한 시민의식도 전제돼야 하겠지만...


##이어진 기사- 과연 '민족전대'인가

5.18연구소 진통 전담교수도 없어
사회참여 교수 적고 학풍도...


전남대 정문은 역사 그 자체였다. 80년 5.18민중항쟁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날 정문이 헐렸다. 당시 이에대해 강력하게 문제제기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이를 두고 '민족전대'의 역사의식을 묻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80년대 후반 전국의 이른바 진보적인 교수들이 광주에 '현대사사료연구소'(소장 송기숙교수)를 만들어 5.18에 대한 증언록 정리 등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을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들어 재정난으로 연구소를 해산하고 이같은 기능을 전남대가 담당해야한다는 지적에 따라 5.18연구소를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나 전남대 일부 교수들은 학교이미지를 이유로 들어가며 반대하는 바람에 진통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5.18연구소는 설립됐으나 수많은 연구소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지역중핵대학을 자처하는 국립대학으로서 민주인권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조치는 거의 없다. 5.18관련 교과목을 편성하고 전담교수 배치는 여전히 메아리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전남대 교수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아쉬움도 적지 않다. 시민사회 발전으로 시민운동의 중요성이 날로 증대하고 있으며 전문성 확보가 절실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지만 이를 보장할 대학교수들의 참여는 많지 않다. 특히 전남대 교수들중에 시민운동에 관여하는 이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라는 게 시민운동단체 간부들의 서운함이다.

학풍의 문제도 그렇다.

대학은 진보적일 수 밖에 없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학문의 속성상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아탑이야말로 온갖 진보담론의 공론장을 형성하며 학문적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이를통해 사회발전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민족전대'는 단순히 구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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