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어줄 사람
울어줄 사람
  • 문틈 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7.11.1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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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아버지를 따라 문상을 갈 때면 상주를 대신해서 곡을 대신해주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조문객을 받을 때마다 여러 날 곡을 해야 하는 상주를 옆에서 도와주는 곡 알바였던 셈이다. 요즘이야 그런 풍습은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는 옛날 풍습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곡 알바는 참 특이한 도우미였던 것 같다. 대신해서 울어주고 수고비를 받는 일이라니. 곡 알바는 시늉으로만 울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가 상주인 것처럼 조문객에게 슬픔을 표해야 했으니 그 일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즘은 그런 우는 도우미가 아니라 자기와 함께 진정으로 함께 울어줄 사람을 찾는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살이에서 맞닥뜨린 온갖 슬프고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일에 공감해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자기나 자기 가족의 일이 아니면 누가 슬픈 일을 겪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지내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살풍경한 모습이다. 자기와 함께 울어줄 사람이 있다면 사람 사는 일이 한결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슬픈 소설, 영화, 연극을 보고 우는 관객들이 있다. 이를 두고 카타르시스니, 감정이입이니 하고 어렵게들 말하는데 적나라하게 말하면 이것은 비극 마켓이다. 슬픈 이야기를 판매하고, 관객은 사들인 슬픔으로 자신의 슬픔을 해소하는 것.

공감력을 자극해서 판매량을 늘리는 구조에 관객은 녹아들어 우는 사람이 된다. 관객이 가상현실에 마음이 동해 우는 것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예술의 한 기능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복잡한 시대는 그런 가상 슬픔에 공감을 표하고 자신의 맺힌 것을 푸는 사업이 잘 되는 듯하다. 삶이 너무나 고달파서일까. 이 생각을 더 해보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내 슬픔에 공감하고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 아닐까싶다.

내 슬픔이 앞산 만한데 뉘 슬픔에 공감하고 같이 운단 말이냐,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예전의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 아닌, 진정으로 자신의 형편, 고통, 슬픔에 공명하여 함께 울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내가 밖에서 가져오는 세상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곧잘 눈물을 흘린다. 교회의 누구네가 남편을 주민센터장으로 만드느라 몇 년을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퉁퉁 붓도록 궂은일을 했다는 이야기 하며, 누구네는 아들 유학을 보내느라 집을 팔고 전세살이를 하는데 집안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는 둥….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린다. 아내에게 내가 울어줄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나는 그렇게 잘 우는 사람이 아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하도 운 기억이 없어 언젠가는 안과를 찾아가 닥터에게 눈물이 안 나오니 잘 봐달라고 한 일도 있을 정도다. 그때 의사는 ‘무슨 울 일이 있나요?’하고 되묻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신문 기사만 보고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유튜브에서 탈북자의 사연을 들어도 눈물이 핑 돈다. 한창 젊었을 때 먹고 사느라 울지 않고 억척같이 살아온 탓에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 남아 있다가 지금 흘러나오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일생 동안 흘릴 눈물의 양이 얼마큼이라고 정해졌을까? 눈물의 총량 같은 것 말이다. 아닐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슬픈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다. 혹시 장구한 진화 과정에서 슬픔이 생존에 유리한 요소로 작용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슬피 우는 사람은 누가 건들지 않고 동정을 받기 쉽다.

어쨌거나 울어줄 사람이 있다면, 즉 자신의 아픔이나 슬픔에 공감하고 함께 울어줄 사람이 있다면 나는 삶이 한결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 대통령 링컨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으로 재직 중에 고향 친구가 찾아와서 그렇고 그런 긴 이야기를 하는데도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다 들어주었다고 한다. 링컨이 그때 함께 울어주었는지는 모른다. 틀림없이 울어줄 이야기였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것만 봐도 링컨은 좋은 대통령이었던 것 같다.

남의 슬픔이나 고통에 공감력을 발휘해 울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쓰고 있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그 반대로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문자 폭탄이나 무서운 댓글을 달아 그 여파로 사람이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진다. 참으로 분하고 참담한 일이다.

난 인터넷이라는 것이 생길 때 벌써 알아보았다. 이것이 나중에 큰 말썽거리가 되리라는 것을. 아니, 인터넷으로 사회가 조각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않는가.

광주는 지난 역사에서 여러 차례 큰 슬픔을 겪었다. 광주 땅 어디에 ‘통곡의 비(碑)’ 같은 것을 세워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와서 자신 때문에, 이웃을 생각해서, 전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울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우리 고장 출신의 대시인 김현승은 ‘눈물’을 ‘나의 가장 나중 지닌 것’으로 비유했다. 지금은 울어줄 사람이 필요한 때다. 당신의 가장 나중 지닌 것을 내놓고 울어 달라.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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