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1)-박상, 박순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1)-박상, 박순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7.05.3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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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선비문화, 학문 세계의 단초 역할
충주박씨 후손들, 서창·소촌동 등 자리 지켜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광주와 전남 중부권역 호남선비들의 역사적 흔적을 주민들과 함께 직접 탐방하고, 이를 통해 의(義)와 예(禮)의 정신함양을 위해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는 주제로 2017 지역공동체 캠페인을 마련했다. 지역민들에게 호남 선비들의 의로운 행적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민들의 관심을 고조시키면서 광주, 전남에서 활약한 호남선비의 업적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내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편집자주>

   
 

햇살이 제법 뜨거워진 초여름 날씨. 눌재 박상(朴祥) 선생의 숨결을 따라 광주 서구 서창동 사동마을에 도착했다.

<시민의소리>는 지난 5월27일 2017지역공동체캠페인으로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의 첫 번째 역사문화탐방의 길을 떠났다.

이날 역사문화탐방은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의 해설로 일행들과 함께 눌재(訥齋) 박상(朴祥) 선생, 사암(思菴) 박순(朴淳) 선생, 용아 박용철 시인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눌재 박상 선생, 호남선비를 말할 때 가장 첫 번째로 내세우는 인물

서창 사동마을은 눌재(訥齋) 박상(朴祥)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재실과 묘가 있는 곳이다. 송학산(松鶴山 210m) 북쪽사면 기슭의 곡간평지(谷間平地)에 자리 잡고 있는 사동마을은 오래 전부터 절골마을로 불렸다. 현재 사동마을은 박상 후손 충주(忠州)박씨들과 후손들이 모여살고 있다.

옛날부터 ‘기, 고, 박’씨를 빼놓고는 광주를 논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또 충주박씨의 땅을 밟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길은 없다고 할 정도로 지역에선 위세를 떨쳤다.

눌재 박상 선생은 호남선비를 말할 때 가장 첫 번째로 내세우는 인물이다. 박상은 1474년 5월18일 광주에서 태어나 1496년(연산군 2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1501년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가 되었다. 이후 성균관박사,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시강원사서, 병조좌랑 등을 거쳐 1505년 전라도도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충절이 남다른 호남의 선비였다.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상소를 주도했던 그는 청렴하고, 직무에 충실해 청백리에 뽑혔다.

대대로 개성에서 살아온 눌재 박상의 집안이 광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대(代)부터다. 성균관 진사를 지낸 부친 박지흥(朴智興)은 처가의 향리 인근인 방하동 봉황산 아래에 닻을 내리면서 눌재가 태어났다.

눌재 박상 선생의 생가터가 있는 사동마을의 눌재 재실(齋室)이 일행들의 첫 번째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오래되고 칠이 벗겨지고 낡았을 거라는 추측은 완전히 빗겨나갔다. 눌재 박상 선생의 15대손으로 문중 회장을 맡고 있는 박종률 씨는 “3년 전 비가 새면서 재실을 수리하고 말끔하게 처리한 상태다”고 설명했다.

눌재 박상공 선생의 재실(齋室)로 들어가는 문 위에 완절문(完節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그는 조정에 있을 때 관직과 권세에 얽매이지 않고 훈구파와 왕의 인척들을 비판하고 정론을 펼쳤다.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는 “우리고장의 선현에 관해 책을 보고 연구해왔다. 5월 끝자락에서 선현 순례를 하는 기회를 만든 <시민의소리>가 대단히 잘했다고 본다”며 “호남선비 중 선두에 놓고 이야기 할 사람이 박상 선생이다. 박순 선생은 박상 선생의 조카로 두 분 모두 감히 쉽게 이야기 할 수 없는 일들을 해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학 호남진흥원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이제 서울과 안동과 광주가 삼각축이 형성되어 앞으로 좋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본다”며 “경주의 양동, 안동의 하회마을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처럼 광주에도 우수한 역사자원이 많이 있다”고 말했다.

▲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

현실과 타협 거부, 소신 굽히지 않은 선비

눌재 박상(1474~1530)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사상적으로 위로는 사육신과 생육신의 정신을, 아래로는 중종반정이나 기묘사화를 낳게 한 도학의 의리사상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눌재 선생은 면앙정 송순, 임억령, 정철 등 자연을 벗 삼아 글을 썼던 이들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이다. 박상의 집안은 화려했지만 가정환경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15세에 부친을 여의고 25세 때는 아버지처럼 의지하고 글을 배우던 맏형 박정을 잃게 된다. 또 몇 년 후엔 아내와 세 자식을 차례로 떠나보내는 등 불행이 꼬리를 물었다.

가정적인 불행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눌재는 꾸준히 학문에 정진하여 모친과 함께 가정을 돌보면서도 뛰어난 도학과 문장, 그리고 정대한 성품을 키웠다. 1496년 22세에 진사가 되고, 이어 1501년 식년문과에 급제, 교서관정자 등을 지냈다.

박상 선생은 30여년의 관직 생활 동안 시종일관 강직하게 대의를 지키고, 굵직한 사건을 만날 때면 정면으로 맞서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등 현실과 타협치 않는 선비로서의 기상을 견지한 인물로 이름나있다.

1505년 전라도 도사로 부임했던 박상은 폭군이었던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애첩의 장인 ‘우부리’를 장살(杖殺. 죄지은 자를 때려죽이는 사형방법)한 죄로 체포명령을 받은 신세가 됐다.

▲ 눌재집(1900년대 초반 간행)
▲ 송호영당에 모셔진 눌재 박상 선생 영정

당시 나주 천민이었던 ‘우부리’는 딸이 후궁으로 뽑혀 하루아침에 왕의 장인이 된 이후 부녀자를 겁탈하고, 남의 농토를 빼앗는 등 온갖 비행을 일삼았다. 전남도도사였던 박상은 이 소식을 듣고 연산군의 장인을 사형을 시켰다.

이후 연산군은 곧바로 박상을 체포할 것을 명했고, 박상은 스스로 상경하는 길에 고양이 한 마리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한양으로 올라가던 길에 만난 고양이를 따라 잠시 절에서 쉬는 사이 눌재를 포박하기 위해 내려오던 관리와 길이 엇갈렸고, 마침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연산군은 폐위됐다.

눌재 박상 선생은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때 모친상으로 또 한번 참화를 피하게 됐고, 나주목사를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5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행들은 눌재 박상 선생의 재실을 둘러본 이후 조금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위치한 눌재의 묘소로 발길을 돌려 참배의 시간을 가졌다. 눌재의 묘소는 정부인 진양 유씨와 함께 모셔져 있다.

지역공동체캠페인에 참여한 추유미 씨는 “이런 유익한 시간을 마련해준 <시민의소리>에게 너무 감사하다”며 “그동안 깊이 있게 호남선비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는데 예향, 의향의 고장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눌재 박상 선생의 일대기에 대해 배우면서 앞으로 우리나라의 국정을 이끌어갈 새로운 정부에서도 이러한 인물이 많았으면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순은 소나무와 대나무같은 절조에 맑은 물과 달빛 같은 정신의 소유자

눌재 박상 선생의 정신은 후대까지 이어져갔다. 눌재 박상 선생을 말할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인물은 그의 조카 사암(思菴) 박순(朴淳) 선생이다.

박순 선생은 선조대왕의 믿음직한 대신이었다. 선조가 내린 여덟 글자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에서 그의 강직한 성품을 알 수 있다. 박순은 소나무와 대나무같은 절조에 맑은 물과 달빛 같은 정신의 소유자였다. 사암의 인격을 가장 잘 표현한 글인 듯 하다.

눌재의 조카인 사암 박순 선생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우고 이황, 이이, 성혼, 기대승 등과 함께 지내며 조선 중기를 이끌어간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손꼽힌다.

눌재 박상의 묘소를 뒤로 한 채 광산구 소촌동 송호영당(松湖影堂)으로 발길을 돌렸다. 송호영당은 후손들이 건립한 곳으로 눌재 박상 선생과 사암 박순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원래 박상의 출생지인 서창동 절골 마을에 있었으나 현재 광산구 소촌로46번길 46(소촌동)으로 위치를 옮겼다.

▲ 송호영당

박상의 후손들은 주로 광산구 소촌동에 살고 있다. 말끔하게 정리된 송호영당은 눌재의 16대손 후손인 용아 박용철 시인의 생가 뒤편에 위치해 보다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다.

눌재와 사암의 영정을 함께 모시고 있으며, 두 분의 시상과 시문, 정치론이 담겨있는 눌재집 12권과 사암문집 7권이 목판 형태로 보관되어있던 곳이다.

송호영당은 사동마을에 있던 재실과는 또 다른 주변 환경으로 일행들의 관심을 끌었다. 눌재와 사암의 유적지는 후손들의 지속적인 관리의 손길이 느껴질 정도로 정돈이 잘 되어있는 편이다.

일행들은 뜨거워진 햇살을 피해 처마 밑 그늘아래 박순 선생과 박상 선생의 영정 앞에 섰다. 사암 박순 선생(1523~1589)은 눌재 박상 선생의 친동생인 박우(朴祐)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순 선생은 나주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랐다.

18세 때인 1540년(중종 35)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개성부 유수였던 아버지의 곁에서 서경덕에게 학문을 배우며 성리학에 널리 통했다.

1553년 31세가 되던 해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공조좌랑 등을 지냈고, 1561년 홍문관응교로 있다가 을사사화를 주도한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을 둘러싸고 명종비 문정왕후의 아우인 당대 권력가 윤원형과 마찰이 있었다.

이 일로 윤원형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나주로 돌아와 기대승과 인연이 되어 교분을 두텁게 쌓았다.

박순은 1572년 우의정으로 임명되고, 좌의정을 지내다 1579년에는 영의정으로 임명되어 15년간 재직했다.

이후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옹호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됐다. 사암 선생의 저서로는 사암집(思菴集)이 있다.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경기도 포천 창수면의 백운계곡 인근에서 지냈던 그는 백운산 시냇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충주박씨를 빛낸 눌재 박상 선생과 사암 박순 선생의 흔적을 뒤로하고 근대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용아 박용철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 사암 박순 선생

눌재, 사암의 정신 현대까지 이어지다

용아 박용철 시인을 말하면 ‘떠나가는 배’의 첫 구절 ‘나두야 간다’가 떠오를 것이다. 용아 박용철 시인 역시 눌재 박상 선생의 16대 후손이다.

용아 박용철 시인(1904~1938)의 생가는 광산구 소촌로46번길 24에 위치해있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주 공립보통학교와 서울 배제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국 현대 시문학의 개척자로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김영랑과 정지용과 함께 문학인으로 활동하면서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했고, 이 때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박용철 시인은 김영랑 시인과 함께 순수시 운동을 펼쳤다. 정열적이고 남성적인 그의 시세계는 30년대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박용철이 시를 통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곱게 바치려 한 것은 티 없이 향 맑은 시혼의 순정 세계였다.

천재는 단명한다는 속설처럼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용아 생가의 한편에는 ‘떠나가는 배’가 적힌 비석이 세워져있다.

이날 지역공동체캠페인을 마무리 하면서 정규철 인문학연구소 학여울 대표는 “사암은 조선시대 우리지역의 대학자이며, 청렴강직성을 강조한 인물이다”며 “지금이야말로 새 시대를 열 중요한 전환점에 있다. 선현의 이러한 고고한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는 “정부가 새롭게 나아가려는 시점에서 국민 개개인들도 선현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정기를 계승하고, 나아가 후손에게 이어지도록 노력하는 자랑스러운 민족이 되었으면 한다”며 “분단의 장벽을 허물고, 남북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도 절의, 청렴으로 올바르게 살았던 선현들의 정신을 계승해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촛불혁명은 부패한 정권에 대항한 국민적 항거일 뿐만 아니라 썩어빠진 정권이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한 자랑스러운 역사로 후손들에게 전해질 것으로 본다”고 마무리 지었다.

▲ 1857년 간행된 사암집

*이 캠페인은 지역발전신문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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