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2)-고봉 기대승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2)-고봉 기대승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7.06.26 17: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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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대의 사상 로맨스, 고봉과 퇴계를 만나다
고봉 기대승, 호남 성리학의 곧은 시대정신 보여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광주와 전남 중부권역 호남선비들의 역사적 흔적을 주민들과 함께 직접 탐방하고, 이를 통해 의(義)와 예(禮)의 정신함양을 위해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는 주제로 2017 지역공동체 캠페인을 마련했다. 지역민들에게 호남 선비들의 의로운 행적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민들의 관심을 고조시키면서 광주, 전남에서 활약한 호남선비의 업적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내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편집자주>

   
 

[시민의소리=김다이 기자] 광주는 기, 고, 박의 고장이라는 말이 있다. 이 집안들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로 이름났다.

특히 ‘기’ 씨를 가장 앞에 두는 것은 그만큼 호남에서 ‘고봉 기대승’이라는 인물을 높이 평가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시민의소리>는 지난 6월24일 2017지역공동체캠페인 ‘오늘 호남선비를 만나 내일을 이야기하다’의 두 번째 역사문화탐방의 길을 떠났다.

이날 역사문화탐방에서는 고봉학술원 강기욱 씨의 해설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숨결을 따라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에 위치한 월봉서원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고봉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 가운데 하나가 광주 광산구 광곡(廣谷)마을이다. 광곡은 우리말로 ‘너브실’이다. 동네 앞에 나주평야처럼 드넓은 들판이 펼쳐 있어 너브실이라고 부르고 있다.

1527년 광산구 너브실 마을에서 태어난 고봉 기대승 선생은 본관이 행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함께 조선시대 성리학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인물이다.

26살 나이차이 불구 사단칠정으로 논쟁

그는 12세 때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20세 때 향시 진사과에 2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유학했다.

이후 1558년 32세에 문과 을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정계에 진출했다. 고봉의 나이 32세에 당시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58세의 퇴계 이황을 처음 만나게 됐다.

퇴계 이황의 26살 아래였던 기대승은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13년간 12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고봉이 정치가로서보다 학자로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단칠정은 성리학의 철학적 개념 가운데 하나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의 사단과 인간의 자연적 감정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을 뜻한다.

예의를 갖춰 서로를 존중하며 학문적 논쟁을 벌였던 이들은 조선 성리학의 사상적 기반을 만들었다. 편지로 치열하게 펼쳤던 논쟁은 훗날 율곡 이이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조선시대 최대의 사상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들의 논쟁은 참된 학문의 열정 속에서 나이와 출신, 사회적 지위 등에 상관없이 진정한 논쟁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고봉학술원 강기욱 씨는 “중요한 것은 사회운동도 좋지만 먼저 인품을 갖춰야 한다. 명품보다 중요한 것이 인품이다”며 “고봉 기대승 선생을 통해서 학문적인 것도 배워할 점이 많지만 정치적으로 배워야할 사람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강기욱 씨는 “퇴계와 고봉이 논쟁을 주고받은 것을 보고 우리는 생물학적 나이가 중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현대사회에서도 나이와 상관없이 먼저 깨우친 사람이 선배로 사회적 이슈를 일으키고 공론화하여 옳다고 판단되는 것이라면 목숨 걸고 실천해야 한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기(機), 세(勢), 사(死) 세글자면 충분하다

우리는 퇴계와 고봉의 관계에서 아들뻘의 주장을 경청하고, 토론 상대로 인정했다는 점을 통해 인품과 지성의 상보적인 만남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백우산 아랫자락에 펼쳐진 월봉서원은 고봉 선생의 다양한 유적지가 있다. 월봉서원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양 옆으로 이어지는 황토 돌담길을 새로 정비하고 있는 중이다.

월봉서원은 고봉 기대승 선생의 사후 7년인 1578년 호남유학생들이 신룡동 낙암 아래에 망천사라는 사당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지금의 장소로 옮겨졌고, 1654년 효종으로부터 ‘월봉’이라는 서원명을 받아 사우, 동재, 서재, 강당 등을 갖추게 됐다.

이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쇄되었다가 1941년 빙월당을 새로 짓고, 1878년 사당과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 등을 추가로 건립해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빙월당(氷月堂)은 월봉서원의 주 강당으로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 9호다. ‘빙월’은 고봉의 투명하고 깨끗한 성품을 표현한 빙심설월(氷心雪月)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가 하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얼음같이 청량하고 달 같이 곱다는 뜻을 담았다.

월봉서원의 동재인 명성재(明誠齋)는 배움에 있어서 밝은 덕을 밝히는데 성의를 다하라는 의미를 담은 기숙사였다. 서재인 존성재(存省齎)는 자기를 성찰한다는 의미를 담은 기숙사였다.

월봉서원의 왼편에 위치한 장판각(藏板閣)은 자료를 보관하는 부속 건물로 고봉 선생의 문집 11권의 판각 474매, 충신당, 명성재, 존성재, 유영루 등의 현판을 보관하고 있다.

고봉은 기(機), 세(勢), 사(死)를 중요시 여겼다. 이는 군자의 출처는 마땅히 기미를 먼저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고, 때를 알아 형세를 살펴 구차하게 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죽기까지 선한 도를 지키는 것으로 기약을 삼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또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 사람과는 그가 누구이든 간에 배척해 마지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조정과 빈번히 마찰을 일으켰고, 사직과 귀향을 되풀이 했었다. 고봉 기대승 선생은 1572년 4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언로 개방 통해 행동하는 지식인 되어야

선조는 모든 장례비용을 보내고 너부실 마을에 안치하도록 했다. 고봉 기대승 선생이 늘 임금에게 강조한 것은 언로(言路)를 개방하는 일이었다.

그는 조정이 언로를 막으면 지식인은 목숨을 걸고라도 능동적으로 항거해서 뚫어야 한다는 입장을 펼쳤다.

고봉학술원 강기봉 씨는 “고봉 기대승의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날에 실천한 사람은 윤상원 열사라고 본다. 실제로 고봉 기대승 선생과 윤상원 열사의 생가는 불과 300m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다”며 “사회적인 사명감을 갖고 인품으로 통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우치고 배워야 한다. 정작 지도층만 잘 모른다. 오히려 일반 시민들이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월봉서원에서 나와 백우산 뒤편으로 걸어 올라가면 백우산 중턱에 고봉 기대승 선생의 묘소가 있다. 묘소는 정부인 함풍이씨와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이렇게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논쟁으로 동시대 사람들은 물론 후대에도 깊은 감동을 준 고봉 기대승 선생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예의와 질서를 지키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 캠페인은 지역발전신문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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