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4)-사암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14)-사암로
  • 정선아 기자
  • 승인 2016.08.17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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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에서 빠르게 도시화된 사암로엔 볼거리가 없다

지난해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역공동체캠페인 사업으로‘함께 길을 걸어요’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로명 홍보에 나선 바 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민의소리>는 광주광역시 도로명 중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명들이 많다는 사실과 함께 왜 이러한 이름의 도로명이 생겨났는지를 모르는 시민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올해 다시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공동체캠페인 지원사업으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난해 보도를 마친 20개 구간을 제외하고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20개 구간을 중심으로 역사적 인물소개, 명명된 의미, 도로의 현주소, 주민 인터뷰 등을 밀착 취재해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편집자 주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암로(思庵路)는 누구를 지칭하는 도로일까? 절개와 겸양의 재상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이다. 정승만 내리 14년을 하였고, 영의정을 7년이나 하였다.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

사암 박순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정치인이자 학자, 시인이다.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청하자(靑霞子)·사암(思菴)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본관은 충주이다.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죽현에서 개성유수 박우(朴祐)와 어머니는 당악 김씨(棠岳金氏)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눌재 박상(朴祥)의 조카이기도 하다.

박순의 선대는 11대조부터 관직에 나아가 대대로 호서에 살았다. 이후 광주(光州)·나주(羅州) 등으로 이주하면서 호남 사람이 됐다. 박순 역시 나주에서 태어났으나, 6세에 어머니를 잃고 이후 광주에서 아버지의 첩에 의해 자랐다.

18세 때인 1540년(중종 35)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개성부 유수였던 아버지의 곁에서 서경덕에게 학문을 배우며 성리학에 널리 통했다.

1553년 31세가 되던 해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공조좌랑 등을 지냈고, 1561년 홍문관응교로 있다가 을사사화를 주도한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을 둘러싸고 명종비 문정왕후의 아우인 당대 권력가 윤원형과 마찰이 있었다. 이 일로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가 기대승과 서간하며 지내다 그 이듬해 12월 다시 기용되어 한산 군수를 지내고 홍문관 직제학·승정원 동부승지·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65년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이량(李樑)·이감(李戡)·윤백원(尹百源) 등을 탄핵하였다. 이후 대사간이 되어 문정왕후의 친동생인 윤원형을 탄핵함으로써 소윤(小尹) 일파를 공격한 주역이 되었다. 이후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72년 우의정으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며 왕수인(王守仁)의 학술이 그릇되었음을 진술했다. 그 후 좌의정에 올랐다.

1579년에 영의정으로 임용됐다. 약 15년간 재직하며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였다가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86년 7월에 박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영평현,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의 백운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배견와라는 초가를 짓고 두보처럼 살았다. 시골 노인들과 더불어 술 마시고 촌부처럼 지냈다.

최고의 서정 시인

박순은 또한 최고의 서정 시인이었다. 느낌대로 진솔하게 당풍(唐風)의 시를 지었다. 이 중에서 절창은 ‘방조운백(訪曹雲伯, 조처사의 산속 집을 찾아가면서)’이라는 시이다.

‘취하여 자다 깨어보니 신선의 집인가 싶은데

넓은 골짜기에 흰 구름 가득하고 마침 달이 지는 구나

서둘러 홀로 걸어 쭉쭉 뻗은 숲 밖으로 나오니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자던 새가 알아듣네.’

참으로 명시(名詩)이다.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간밤에 자던 새가 듣더라’는 시 구절이 얼마나 유명했으면 박순의 닉네임이 ‘박숙조(朴宿鳥)’, ‘숙조지(宿鳥知) 선생’이었을까.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오는 일화이다.

박순은 손곡 이달,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 등 삼당시인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유희경도 박순에게 시를 배웠다. 허균의 스승인 이달은 서얼이요, 부안 기생 매창의 연인 유희경은 천민출신인데도 박순은 신분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박순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에 있다. 근처의 옥병서원에는 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아울러 광주광역시에 송호영당,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월정서원에도 박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광주광역시나 나주시가 박순을 그리 기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서로는 《사암집(思菴集)》 7권이 있다.

논밭에서 아파트 단지로 빠르게 변화된 ‘사암로’에는 볼거리가 없다

   

▲ 송정고가도로에서 부터 시작되는 사암로.

사암로는 조선시대 학자 사암 박순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2009년 9월 14일에 명명되었다. 사암로는 송정고가도로에서 하남산업단지를 지나 광산교차로에서 북문대로와 만나며 끝이 나는 무려 9000m의 긴 길이었다.

사암로가 시작되는 송정고가도로 밑 신촌대주파크빌아파트(사암로 24)에 도착했다. 덥고 습한 날씨에 이번 취재가 만만치 않을 듯하다. 

고가도로 밑은 보수공사가 한 참 진행 중이었고,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땀방울이 가득했다. 고가도로의 자동차 소리와 근처 공항의 비행기 소리가 가득한 이곳은 소음으로 주민들이 살기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 YIF광주문화체육센터.

위험한 공사현장을 지나 4차선의 일반국도에 진입했다. 양 옆으로 산이 보였고, 작은 가게들이 넓은 간격을 유지하며 이어져 있었다. 4차선의 길을 따라 올라가니 IYF광주문화체육센터가 자리를 잡고 운영되고 있었다. 예전에는 롤러스케이트장으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문화체육센터로 바뀌어 체육행사와 공연 등이 진행되고 있었다.

상가와 많은 아파트단지를 지나니 모르는 사이 사암로는 6차선으로 넓어져 있었다. 사암로 주변 일대 신시가지인 신가지구, 신창지구, 수완지구는 1980년대 이전에는 논과 밭이었다.

▲ 하남교에서 바라본 사암로 일대의 수많은 아파트 단지.

사암로에 위치한 초등,·중등·고등학교는 모두 1980년 이후 대규모 택지개발과 함께 건설된 나이가 적은 학교였고, 건물들 또한 낡은 주택이 아닌 크고 깨끗한 아파트들이었다. 지금은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이처럼 대규모 개발에 의해 탐생한 신도시에는 볼거리가 없다는 것이 흠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지역을 개발시켜서 그 지역의 오래된 명물이 없다는 것이다.

새롭고 특색있게 개발되었다면 광주의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생겼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파트 기둥들만 서 있는 이곳은 답답하고 볼 재미가 없었다.

수많은 아파트 단지와 상가로 이루어진 길을 지나 광산구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광주하남일반산업단지에 들어섰다. 광주권 종합개발계획에 의한 도시기반확충의 하나로 조성된 내륙공업단지이다. 여러 공장들이 즐비한 이곳엔 많은 사람들이 생산과 수출에 힘쓰고 있다. 이로 인해 이 도로는 큰 트럭과 차들이 많이 다니니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길이다.

▲ 차도 주변 조경은 잘 꾸며져 있었다.

큰 볼거리는 없었지만 새로 만들어진 도로는 조경이 잘 되어 있었다. 양 옆과 중앙 차선에 화단을 꾸며 예쁘게 만들어 놓았다.

하남교에 이르러 영산강에서 갈라져 나온 풍영정천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생태하천이라며 예산을 들여 탈바꿈시켰지만, 지난 6월 이곳에서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아마 급격한 개발에 따른 하천 오염이 물고기에게 스트레스를 준 것으로 추정된다.

▲ 사암로는 광산교차로와 만나며 끝났다.

사암로는 광산교차로인 북문대로를 만나며 끝이 났다. 이 길에도 사암 박순에 대한 알림은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사암로가 박순이란 사람의 호를 붙였다는 것도, 박순 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모를 것이다.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을 모시는 곳, ‘송호영당’

▲ 송호영당

사암로의 주인 사암 박순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하여 사암로와 조금 떨어진 소촌로 46번길 송호영당을 찾아갔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눌재(訥齊) 박상(朴祥, 1474~1530)과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을 추모하는 사당으로, 1728년 영조4년에 충주박씨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박상의 출생지인 서창동 절골마을에 있었으나 현 위치인 소촌로 46번길 송호영당 자리로 옮겼다.

눌재와 사암의 영정을 함께 모시고 있으며, 두 분의 시상과 시문, 정치론이 담겨있는 눌재집 12권과 사암문집 7권이 목판 형태로 보관되어있는 곳이다.

정면 3칸·측면 1칸의 골기와 맞배지붕 구조로, 건물 중앙은 영정 봉안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좌우는 온돌방을 만들기 위해 칸막이를 설치하였고, 주초는 자연석 덤벙주초이며, 뒤쪽 벽에는 뒤쪽 벽에는 창방소로 장혀위에 납도리를 걸쳤다. 창호는 분합문으로 빗살 창살로 되어 있고, 주두위의 포작은 익공식을 따르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담장은 붉은 벽돌, 대문은 평문이다. 1995부터 1998년에 걸쳐 사당, 담장, 진입계단의 보수가 이루어졌고, 효자각 등이 건립되었다.

광주유형문화재로 지명되어 있으며, 둘레엔 어린아이 높이의 기와 담장이 외부와의 방어역할을 하고 있었다. 입구는 울타리로 막아져있어 실제로 들어가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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