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 그리고 희망가(2)
태평천하 그리고 희망가(2)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6.03.31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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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천하가 태평하니 희망을 노래합시다”하고 말해 보지만, 1940년에 채만식에 의해서 ⌜태평천하⌟가 출간되었을 때에도 2016년의 총선거의 계절에도 전혀 가당치 않은 말씀이다. 천하태평은 우리들의 소망은 될지라도 현실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의 물적, 인적 조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평천하를 말하는 것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반어적 풍자가 절망하는 마음을 달래주는 감성 만족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의 작품 배경이 1938년임을 구태여 밝히는 것은 독자들에게 그 시대성을 귀뜸하는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조선이 전시체제로 개편되면서 내선일체의 동화정책이 강화되고, 1938년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조직하고 육군 지원병제도를 도입하였다. 1939년에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1938년부터 가혹한 태평천하가 시작되고 있었으니, 작품 ⌜태평천하⌟는 반어적 풍자로, 식민지 지식인의 냉소를 드러내는 고발문학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신랄한 풍자와는 다르게 현실을 천하태평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자문해 본다.

망국의 안타까움과 식민지의 가혹한 현실이 엄존하고 또 미만함에도 불구하고 ⌜태평천하⌟의 잘난 주인공 윤직원의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형상화된 그의 시대의식을 경청해 본다.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화적패가 있느냐? 부랑당 같은 수령들이 있더냐? 재산이 있어도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같던 말세는 다 지나가고...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한 정사,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일본은) 수십만 명 동병을 하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하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이걸 태평천하라고 하는 것이여, 태평천하... 그런디 이런 태평천하에 태어난 부자 놈의 자식이 더군다나 저나 떵떵거리고 편안하게 살 것이지 어째서 지가 세상 망쳐 놓을 부랑당패에 참섭을 한단 말이여...”

주인공 윤직원의 자못 긴 넋두리성 절규는 유학 마치고 검·판사 될 것을 기대하였던, 시쳇말로 금수저가 분명한 그의 손자 종학이 사회주의에 참여하였다는 소식은 그의 세계가 무너지는 경천동지할 파열음이었다. 자기 재산만 지켜주고 그의 안일을 지탱해 주면 윤리 도덕이 문제될 것이 없고 식민지를 운영하는 일제가 그의 태평천하를 보장해 주는 둔덕이 되고 산성이 되었던 것이다.

윤직원의 일제에 대한 감사 사설은 중일전쟁의 평가에서도 빛난다. “자아 보소 관리허며 순사를 우리 조선으로 많이 내 보내서 그 숭악한 부랑당놈들을 말끔 소탕시켜 주고 그래서 양민들이 그 덕에 편히 살지를 안넝가? 그러구 또 이번에 그런 전쟁을 하여서 그 못된 놈의 사회주의를 막아 내주니, 원 그렇게 고맙고 장한 노릇이네” 일제하의 그 어두운 시절에 윤직원의 안보관과 반공관은 이렇게 확실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가소롭고 안타까운 태평천하 주인공의 시국담은 일제하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홍어타령하면서 신나서 죽고못사는 일베무리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는 현실. 역사 국정화 작업 같은 일이 국가 기관에 의해서 은밀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널부러진 흙수저가 천하에 미만해도 내집의 금수저만 온전하면 그만인 권력자, 금력자들 또한 우리들의 이웃이고 태평천하의 주인공들이시다. ‘좋아졌네 좋아졌어’ 하는 새마을 찬가로 우리들의 정치감각을 마비시키면서 마의 유신시대를 열었던 박정희가 반인반신의 우상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해괴한 소식도 이제는 뉴스가 되지 않는 태평천하가 오늘이다.

총선의 계절에 “박근혜정부가 일 좀 하게 해주세요”라는 썰렁한 구호를 내거는 사람들이 만든 세상이 가관이다. 사드 파동, 소득 불균형, 헬조선으로 상징되는 7포세대의 절망이 켜켜이 쌓여왔는데, 또 다시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일 좀 하게 해 주세요”하고 이양 떠는 심사가 차라리 괴기스럽다. 박근혜시대를 총괄하는 ⌜대한민국 몰락사⌟는 바닥을 치는 대한민국의 행복지수를 거론하면서 경제적 생활고와 경쟁에 시달리며 불안에 떠는 민생을 개탄한다.

그런데도 지금 이 시간에도 민생은 벼랑에 몰리고 있다. 태평천하의 시대배경은 중일전쟁 과정이었다. 제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우리들의 절망을 달래는 21세기의 희망가를 부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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