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에게 메세나를 묻다
메디치에게 메세나를 묻다
  • 정인서 편집국장
  • 승인 2013.04.25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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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서 시민의소리 편집국장

메디치씨를 만나러 갔다. 그가 있는 곳은 동네에서 좀 언덕배기를 따라 올라가 햇빛이 잘 들어오는 유럽풍의 2층집이다. 평소처럼 초인종을 누를까 하다가 6자리 비밀번호를 꾹 누르고 문을 열었다. 그가 언제든지 찾아오라며 나에게 알려준 현관 비번이었다.
2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작업실 문을 여니 그는 오늘 따라 무척이나 바빴다. 평소 같으면 얼굴을 쳐다보면서 “엉~ 왔어!”라고 오른손을 들어 흔들며 먼저 인사를 건넬 텐데 그렇지 않다. 얼굴 표정을 보니 그리 나빠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는다.

누가 먼저 인사를 하든 별 일 아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메디치씨, 바쁘신가 봐. 사람이 그래도 얼굴이라도 봐주지. 바쁜 것 같은데 뭘 도와줄까?” 가끔 그가 하는 일을 도와주었던 터라 오늘도 인사말로 건넸다.
그래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의 인사를 들은 것인지 아닌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헐~!’ 속으로 이렇게 내뱉고는 이번에는 그가 바쁘게 만지작거리고 있는 책상의 큰 사각상자를 왼손으로 툭 치며 “메씨! 나 좀 봐봐~”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그는 “어쿠! 손 대지마!”하면서 갑자기 큰소리를 지른 채 그도 왼손으로 내 손을 세게 내리쳤다.

‘아 뜨거!’ 그가 손으로 내리치자 아프다기보다는 손등에 불이 붙은 냥 뜨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등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화가 나기보다는 너무 어이없었다. 메디치씨는 그제야 내 얼굴을 쳐다보고 “엉~ 왔네” 한 마디만 한 채 다시 사각상자를 신주 모시듯 조심스럽게 다뤘다.
그는 내 손을 너무 세게 때린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나는 좀 아프기는 했지만 특별하게 그를 탓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는 날마다 세상의 중심에 살고 있었다. 그는 자주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집이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 언젠가는 그의 꿈대로 세상의 빛이 여기에서 나와 여기저기로 펼쳐질 것이라 믿었다. 사실 그는 엄청난 부자다. 아마 피렌체에서 은행업으로 돈을 벌었고 교황청의 주거래은행으로 지정된 이후에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왕국과 귀족 가문들의 주거래은행으로 세를 넓혔다.
아무도 그에게 대적할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돈만 버는 것이 아니라 번 돈을 잘 쓸 줄도 알았다. 피렌체에서 그림 그리는 이들을 후원했다. 화가들끼리 모임도 자주 만들어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새로운 작업방법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르실리오 파치노에게 부탁해서 플라톤 전집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도록 했다. 당연히 돈은 메디치가 지불했다. 플라톤 철학이 유럽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로마시대 이후 이때가 처음이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안겨주었다. 신문명의 기원을 맞이하는 듯 했다.
아마 인문학의 ‘빅뱅’이라 해도 될 성 싶었다. 플라톤 철학은 피렌체는 물론 다른 유럽 도시들에게 퍼지면서 예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회화-건축-조형의 3대 분야에서 수많은 천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메디치는 세상을 보는 혜안과 통찰력이 있었다. 그가 은행업으로 교황청의 주거래은행이 된 것도 신뢰를 지키기 위해 폐위된 교황에게 150억원을 들여 구출하는 바보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이 새로운 교황에게 내심 인정받은 것이다.
메디치는 신용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애썼고, 동방의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피난을 오자, 그들에게 거처를 마련하고, 아낌없는 후원을 했다. 그의 후원에는 대가가 따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만 최선을 다해 도움을 줄 뿐이었다. 아마 그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익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메디치를 무척 존경한다. 그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그를 만날 때마다 존경의 눈빛을 보내곤 했다. 아마 오늘 그가 신주 다루듯 하는 그 사각상자에는 으레 그러했던 것처럼 누군가의 작품이 들어있으려니 생각한다. 그는 새로운 작품이 들어오는 날이면 이렇게 긴장하곤 했다.

“메씨, 오늘은 뭐야, 나도 좀 보여줘?”
“엉~”
그는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인사를 하건 무슨 말을 하건 항상 ‘엉~’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의 인사는 늘 정감 있었다. 그리곤 이내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며 나에게 자랑했다.
“광주가 아시아문화중심도시가 될 터인데 우리 작가들이 힘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이번에 적금 들었던 것을 타가지고 작품 좀 샀어. 아직은 이름 없지만 내 친구들도 작품을 사도록 해서 후원해주면 큰 작가가 될꺼야.”

메디치는 꽤나 흥분하며 말했다. 나도 그의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가끔 사곤 한다. 광주 작가들이 한 달에 50만원 수입도 안된다는 데 최저임금도 못미치면 무슨 의욕을 갖고 그림을 그릴까라는 생각을 갖는다.
메디치씨는 “작품이 크든 작든 자주 팔릴 수 있다는 분위기가 문화중심도시에 만들어져야 진짜 문화도시가 되는 것 아니겠어?”라고 나에게 반문했다.

메디치씨는 얼마 전에 미켈란젤로를 양자로 들였다. 그의 천재성을 보고 전적으로 후원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르네상스가 이때부터 꽃피우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도나텔로 등 거장들의 명성에 짓눌려서 르네상스를 단편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은 르네상스가 가능하도록 만든 것은 메디치씨 덕분이다.
그는 미리 유언을 남겼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작품을 피렌체에 기증하겠다. 단 한 가지 조건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작품을 팔면 안된다.” 덕분에 피렌체는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도시가 되었다.

산토 스피리토 성당, 산 로렌초 성당, 산 마르코 성당, 팔라쵸 메디치 등등 수많은 건축물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비롯한 갖가지 조각, 브루넬레스키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 상 등등,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르네상스의 걸작들이 피렌체에 가득하다. 피렌체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거대한 유적이자 유물이다.
재일교포 하정웅씨가 지난 10여년간 광주에 자신의 소장품 2,300여점을 기증했다. 전국에는 1만여점이다. 그 작품 속에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도 있고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의 작품도 있다. 그가 광주, 아니 한국의 메디치라 해도 될 성 싶다.

또 광주에서 지역작가들을 후원하는 분들이 이밖에도 있다. 하지만 너무 그 숫자가 적다. 광주의 시민들이 적금을 탈 때마다 누군가의 작품을 산다면 어떨까. 이 일이 광주의 신르네상스를 일으키는 메세나운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부터 오늘 대인예술시장을 찾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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