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희생은 선택일 뿐. 당당하게 서라
딸아, 희생은 선택일 뿐. 당당하게 서라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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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에게 주는 요리책 / 박형옥 박이은경 지음, 도서출판 이프>

2년 쯤 전인가?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의 다소 호들갑스러웠던 반응을 난 잊지 못한다. 그 중에 상당히 부각되어 나왔던 얘기는 엄마가 딸에게,
'착한 며느리가 되려고 너무 노력하지 말아라' '네 부엌 아닌 데서는 일하지 말아라' '명절이나 생신 때도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말아라, 차라리 둘이서 여행을 떠나서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라'...
등등의 충고를 했다는 얘기다.

딸은 그대로, 명절 때는 남편과 함께 외국 여행을 다녀오고, 시부모님 생신 때는 당당하게 남편을 부엌으로 불러들여 설거지를 시켰다. 그 다음 명절엔 지방 어느 휴양지 콘도에서 쉬었다가 설날 오후에야 시댁에 들렀다나?
난, 그 얘기를 들으면서 솔직히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큰며느리로서의 내 입장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딸 박이은경은 둘째며느리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안하는 만큼 고스란히 그 일은 큰동서에게 전가되는 것이라고 난 생각했다. 난 큰며느리라서 일단 큰며느리 입장이 먼저 생각되는 것일 게다.

그러나 며칠 전 우연히 읽게 된 이 책은, 이제 보니 제법 괜찮은 책이다. 어머니가 글 하나 써놓고, 그 글에서 언급했던 요리법을 몇 개 펼쳐놓고, 이번엔 딸이 또 글 하나 써놓고 그에 걸맞은 요리법 하나 소개하고... 요리법도 간단하고 실용적이었고, 그보다도 엄마와 딸이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동지처럼 풀어놓은 수다가 정말 재미있었다. 처음 여성지에서 몇 부분만 발췌해서 써 놓았던 글들의 급진성도 앞뒤를 맞춰 읽으니 이해가 갔고 공감이 갔다.

엄마는 착한 며느리가 되고자 전전긍긍하는 딸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은경아,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바로 너이고 또 네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하지 않아도 될 일, 하기 싫은 일에 대해선 그것이 아무리 시어머니 말씀이라도 'NO' 할 줄 알아야 한다." - 우리 엄마가 이런 얘길 해주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또, 지혜로운 시어머니라면 모처럼 오는 며느리에게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하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주장! - 체력이 달리면 일일도우미라도 써서 며느리에게 즐겁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을 호소하는 딸에게 '출가외인'이라며 엄히 대할 것이 아니라 딸이란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마음으로 보살펴주고 도와주고 소중히 해야 할 나의 자녀라는 생각 - 이건 내 딸에게 내가 이렇게 해줘야겠다.

악질 며느리가 된 딸은 '네가 의무를 회피하고 있는 동안 누군가는 희생을 치러야 해'라는 남편의 말에 당당하게 대꾸한다.
"그 희생은 <선택>일 뿐이야!"

손아래 동서가 명절에 못 온다고 전화할 때마다 난 겉으로야 '어머님 허락 받으면 알아서 해' '못오면 안오는 사람만 손해지, 맛있는 거 우리끼리 다 먹을테니...'라고 말했지만, "네가 안하는 만큼, 꼭 그만큼이 내가 더 해야 할 일이지"라고 생각하며 속이 편하진 않았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오히려 입장이 좀 정리가 되면서 마음이 풀린다.
내가 하는 일은 그것이 희생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
내 딸에겐 언제까지나 내가 친구가 되고 동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것!

항상 도움만 받는 친정엄마께 이젠 도움을 드릴 수 있어야 겠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명절을, 명절이 갖는 즐거움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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