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길]한 신학생의 광주(光州)(1)
[이홍길]한 신학생의 광주(光州)(1)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상임대표
  • 승인 2012.02.17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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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상임대표

망각 때문이건 고의건 간에 5․18 광주항쟁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유난히도 지독한 한파에도 불구하고 생뚱맞을 수도 있는 30여 년 전의 5․18을 새삼 거론하는 것은, 소위 518 주체들의 이권투구에 식상해서도 아니고 잊혀져가는 5․18을 드높이고자 하는 민주투사의 충정도 아니다.
당시 한 신학생의 5․18에 관련한 결단이 대견하면서도 가슴 시리고, 그래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원초적 물음을 재음미할 밖에 없는 우리들의 일상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한 신학생, 그의 이름은 문부식. 그의 기억에 의하면 부산 송도의 바닷가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울던 초라한 신학생 한사람이 그였다. 높은 역사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시대의 여느 대학생들에 비해 비판적 사회의식이 확고한 것도 아니었던 그가 그때 왜 그렇게 몸살을 앓고 있었던가를 뒤돌아본다.
그의 유추로 보면, 비록 한 번 가본 적 없는 곳이지만 그가 살고 있는 나라의 한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에 깊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지적하지만 광주항쟁 이후 6․10항쟁에 이르는 고비 고비마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투신하고 분신하여 전두환의 광주 만행에 항의 하였던가를 상기하면 5월 그날의 적막을 털고 감연히 일어서는 이 땅의 젊은 희망들을 볼 수 있었다.

광주의 억울한 죽음에 몸살 난 그는 친구들과 함께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다. 광주의 비극을 상기시키고 미국과 전두환의 더러운 결탁을 고발할 수 있다면 그는 그의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확신한 것은 광주의 비극은 광주시민들만이 아니라 모두의 비극이며 그것에 대한 책임은 그날 학살을 명령한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와 그들의 잔악행위를 묵인하고 이를 은밀히 지원한 미국정부에 있었다.
그 후 이 사실은 광주항쟁에 대한 우리 사회의 통념처럼 되어 반미가 새삼스럽지 않게 되었다. 문부식의 설명에 의하면 계엄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던 광주시민들에게 전두환은 발포를 명령했다.

시민들을 폭도라고 생각한 병사들은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으며 궁지에 몰리고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총을 들었던 것이다. 무자비한 야만의 총구 앞에 자위할 방법은 저항 뿐 이라는 것. 그리하여 조금만 더 버티면 이웃 동포들이 자신들을 돕기 위해 달려 올 것이라는 기대. 당시 광주에는 정읍 순천 등지에 수천을 헤아리는 민주 학생 시민들이 광주로 들어오기 위해 집결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심지어는 미국의 항공모함까지도 민중항쟁을 돕기 위해 부산에 왔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날 그곳에 도움을 주려고 달려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진압군의 마지막 살육이 자행되던 새벽 그 시간 광주의 형제들마저 도울 수 없었고 돕지 않았다.

‘진압군이 들어오니 우리를 도와주세요.’하는 애절한 호소만이 메아리처럼 꺼져간 밤이었다. 이윽고 열사들의 생명 또한 그렇게 꺼져갔다.
광주 민중항쟁을 저지하기 위해 죽은 20여명의 공수부대원들의 시신이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혀있고 그들의 신상카드에는 ‘80년 5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폭도들에 의하여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 폭도들이 진즉 민주유공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동작동의 공수부대원들은 알까 모를까? 당시의 한 병사가 정신이상으로 국립정신치료감호소에 갇혀있다는 사실 외에 어느 병사도 광주를 찾아 사죄한 적이 없고 5․6공의 후배권력은 지금도 잘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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