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50돌을 맞이하며
4.19혁명 50돌을 맞이하며
  • 기세문
  • 승인 2010.04.23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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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문 통일운동가

1960년 4월,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 승리 50주년을 맞이하여, 지금 서울 수유리의 「국립 4.19 민주묘지」에 잠들어 있는 228위의 4월 혁명 영령들께 멀리서나마 머리 숙여 묵념을 드린다.

이승만 독재를 물리친 4.19혁명은 그 해 2월 28일 대구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의 데모로부터 시작하여,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전국적인 시위로, 마침내 4.19혁명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자유당 이승만 정권은 국민과 야당을 혹독하게 탄압하면서 3인조와 5인조를 조직하여 공개적으로 이승만을 지지하는 투표를 하도록 부정선거를 자행했던 것이다. 부정선거 규탄,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시민들의 투쟁은 3월 15일 투표 당일에 더 크게 일어났는데, 특히 경남 마산에서는 이날 시위 중에 경찰의 발포로 죽은 후 행방불명된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4월 11일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이를 목격한 마산 시민학생들의 데모가 더욱 격렬해지고, 강렬한 반독재투쟁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3.15부정선거 시위가 반독재투쟁으로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 농성과 평화적인 시위를 하고 돌아오는데, 반공청년단과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깡패 100여명이 몽둥이 테러를 함으로써, 학생시민들의 감정을 더 크게 자극하여 끝내는 4.19혁명이 폭발하게 되었다.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 실시하라’는 구호로부터 시작한 고등학생들의 투쟁에 이어, 서울대생들을 비롯한 수만 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중앙청과 경무대(청와대)를 향하여 세종로, 효자동 등에 집결했으며, 여당지 서울신문사와 반공청년단 본부, 자유당 본부를 불 지르고,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의 집을 습격했다. 서울 시내가 무정부 상태로 된 이날, 경찰의 무자비한 발포로 100여명이 목숨을 잃고, 수천 명이 총상을 당하는 참담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계엄령 선포와 각 학교마다 휴교령이 내려졌으나, 그 다음날 20일에도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투쟁이 더욱 확대, 고조되었으며 그 다음 다음날도 투쟁이 계속되었다.

4월 25일에는 서울 각 대학 교수 259명(전국 27대학 300여 교수 참가)이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시 물러나라,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하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이승만 물러나라’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했다. 4월 26일에는 마침내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하고, 4월 29일에는 프란체스카(호주댁)와 같이 극비리에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에 앞서 28일에는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이승만의 양자)이 자기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을 사살하고 자살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4.19혁명 당시 경찰의 발포로 인한 학생, 시민들의 사망자는 183명(186명이라고도 함), 4.19 전후 4월 혁명 관련 사망자는 김주열 열사를 비롯하여 228명(수유리 국립 4.19묘지 안장), 총상에 의한 부상자는 확인된 수만 6,259명이다.

미완의 혁명, 민주주의·통일로 열매 맺길

한편 우리 광주에서는 4월 19일부터 광주고등학교를 비롯한 수천 명의 시내 고등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했다. 나는 도청 앞 광장, 금남로에 모여든 시민학생들과 함께 있었다. 경찰들이 소방차 호스로 붉은 색소가 든 최루액을 뿌려 옷이 젖고, 최루탄 가스에 눈물이 쏟아지며 아팠다. 저녁 7시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발포령이 내려, 학동 파출소 앞에서는 바로 내 곁의 학생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강정섭 학생인데, 광주의 첫 희생자였다. 이 희생으로 더욱 흥분한 시위대는 학동 파출소를 파괴하고 이어서 양림동, 월산동, 유동, 계림동, 충장로 등 시내 전체 파출소를 파괴해버렸다. 나는 밤 10시경 금남로에서 경찰에 붙들렸다가, 죽음을 각오하고 탈출했으나 다행히 총은 맞지 않았다. 시내 전등이 전부 꺼져 있어서 경찰을 보지 못해 붙들렸는데, 또 어두웠기 때문에 경찰의 총탄이 나를 맞추지 못한 것이다.

20일에는 전남대생을 선두로 한 학생들이 대거 데모에 참가하여 수만 명의 시민학생들이 투쟁하였다. ‘3.15 부정선거 무효, 이승만 물러가라, 죽은 학생 살려내라’라는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에, 경찰들의 발포로 또 사망자가 속출했다. 광주에서는 16세에서 19세의 고등학생 6명과 21세의 여성이 총탄에 맞아 사망했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있었다. 또한 목포를 비롯한 전남 출신으로서, 서울에서 시위 중 사망한 학생들이 11명이었다.

4.19 혁명을 미완성 혁명이라고 한다. 청년학생들의 힘만으로는 혁명이 완수될 수 없는 한계성이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의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의 투쟁은 장렬했지만 각성된 민중들의 힘과 함께 하지 않는 투쟁은 성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박정희 일당의 군사쿠데타로 4.19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는 정의를 향해 변화 발전하는 필연성이 있기에 79년 10.26의 박정희 종말, 80년 5.18광주민중항쟁, 87년 6월 항쟁으로, 4.19혁명은 3.15부정선거 규탄과 이승만 독재를 물리치는 투쟁으로 시작하여, 외세반대와 분단극복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미완의 4.19혁명 완성으로 민주주의 승리와 조국의 자주통일을 이룩하여 못다 피고 져버린 4월 청춘의 꽃이 활짝 피어 웃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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