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아드네의 실과 파르마콘
아리아드네의 실과 파르마콘
  • 시민의소리
  • 승인 2005.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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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대한민국]김우경(미디어 활동가)
현 시기를 서양 철학사에서는 탈근대(포스트모던)라고 이야기한다. 근대 서양 철학에서 중심되었던 이성과 로고스(논리)에서 벗어나 몸과 파토스(감성)를 중시하는 새로운 사유의 흐름이다.

새로운 개념들이 중시된다. 근대에서 중시되지 않았던 존재와 존재간의 연계성, 텍스트와 텍스트의 사이, 다양성, 이질성, 타자성, 주변성이 중심 개념으로 등장한다. 이 개념들은 뿌리줄기(리좀)가 갖고 있는 성질처럼 횡적운동을 하며 시작도 끝도 없이 성장한다. 이러한 관계성과 다양성이 가능한 것은 분리주의나 열등감의 반대편에 있는 차이의 개념이 탈근대의 중심원리이기 때문이다.

즉 근대의 중심원리인 동일성의 철학에서 벗어나 차이의 철학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과 서양 철학내용과의 시간적 격차 존재 여부와 그 내용을 일방적으로 적용 가능한지는 논의의 대상이다. 헤겔이 법철학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항상 황혼녘에 날아오른다’고 하여 철학은 시대의 새벽을 알리지 못하고 항상 모든 것을 정리하는 역할만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어쩌면 우리의 현실은 서양 철학사에서 말하는 탈근대에도 아직 오지 못한 것은 아닌지.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감성의 시대’라고 말하였고 그러한 흐름이 진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적 사유의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중심의 원리, 동일성의 원리가 현실에서는 주된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아시아 문화 중심도시, 그러면 나머지 도시들은 아시아 문화 주변도시인가? 물론 중심이 없이 어찌 주변이 존재하랴만은. 그렇지만 사고의 지점과 방점은 달라져야 한다. 도시와 도시들 간에는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게 마련이고 그 차이를 인정하고 그 상호의 연계성을 강화하는 형태의 도시로서 광주의 역할을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부산이 영화제로서,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서 각광을 받고 있어서 다른 지역에서도 부산을 모델로 해서 (특히 광주국제영화제) 부산을 따라가고 있다면, 그러한 사고는 아직 근대의 사유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와 달리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나눔을 실천하여 각자의 지역에 맞는 성격의 영화제를 개발하고 그 내용을 키워내는 노력만이 영화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길이 될 것이다. 광주영화제가 정관문제로 시끄러운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에는 문화적 마인드보다는 현실 정치 냄새가 깊게 배여 있다고 보인다. 물론 문화정치라는 용어가 회자되는 현 시점에서 순수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문화운동의 성격이 부여되어야 할 영화제에 정치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부산이 성공의 첫 번째 요인으로 꼽는 영화제 운영의 독자성을 심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제에 지원을 하되 간섭하지 않는 것이 문화정책의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탈근대의 사유가 갖고 있는 다양성에서 비롯되는 무정부 상태와 근대의 동일성과 중심의 원리를 뛰어넘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존재를 가로질러 대화를 풍요롭게 하는 횡단적 연계성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마인드가 이러한 역할을 이루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플라톤이 이야기한 ‘파르마콘’(약/독)이 되어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모든 문제점을 불식시키고 새 시대의 도래를 축하하는 오르페우스의 즐겁고도 예언적인 목소리가 되면 더욱 좋겠다.

/김우경 미디어활동가 makemovi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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