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8)-면앙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8)-면앙로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6.07.0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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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 송순의 호에서 이름 따 와
지난해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역공동체캠페인 사업으로‘함께 길을 걸어요’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로명 홍보에 나선 바 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민의소리>는 광주광역시 도로명 중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명들이 많다는 사실과 함께 왜 이러한 이름의 도로명이 생겨났는지를 모르는 시민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올해 다시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공동체캠페인 지원사업으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난해 보도를 마친 20개 구간을 제외하고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20개 구간을 중심으로 역사적 인물소개, 명명된 의미, 도로의 현주소, 주민 인터뷰 등을 밀착 취재해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편집자주

면앙로는 무등산 가사문학권에서 창작 활동을 했던 문인 송순의 호에서 이름을 따 왔다. 용봉동 15-3번지에서 시작해 두암동 460-2번지에서 끝나는 왕복 4차로로 약 2206m다. 2008년 11월 17일에 고시됐다.

우치로를 따라 북구청과 전남대학교 후문을 지나 200여m 가다보면 전대 공대 앞에 이르러 용봉로터리가 나온다. 이 곳에서 우측으로 쭉 뻗은 길이 바로 면앙로다. 무등도서관과 우산수영장 방면으로 가는 길이다.

면앙로 역시 역사성과는 거리가 멀어

면앙로 역시 금재로나 대천로와 같이 역사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 길 위에 면앙정 송순이 태어난 생가터가 있는 것도 아니요, 면앙정과 연결지을만한 역사적 흔적도 없다. “가사문화권으로 가는 방향이라 송순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는 북구청 관계자의 말대로 그냥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호를 따와서 지은 것이다.

용봉로터리에서 무등도서관 사거리까지의 이 길에는 2개의 초등학교와 1개의 중학교, 1개의 시립도서관이 있다. 또 산책하기 좋은 우산근린공원도 자리하고 있다. 나머지 거리의 풍경은 다른 여는 도로와 마찬가지로 아파트와 상가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다.

▲ 우산 주공 앞에서 바라 본 면앙로

용봉사거리에서 100여m 직진하면 1991년 6월 5일에 개교한 문흥초등학교가 나온다. 문흥초는 면앙로 19번지다. 이어 1989년과 1990년에 지어진 우산주공1, 2차 아파트가 면앙로 32번길 시작점 건너에 자리잡고 있다.

좀 더 가면 면앙로는 효동로와 만나고 헤어진다. 그리고 다시 중문로와 만난다. 중문로에 이르니 우산지구대가 나오고, 북구건강복지타운 입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광주 북구건강복지타운은 사업비 176억원을 투입해 광주 북구 우산동 우산근린공원 내 1만508㎡ 부지에 연면적 7천655㎡, 지하 2층 구조로 2012년 9월 27일 준공됐으며 수영장, 헬스장, 에어로빅실과 아동 상담·치료실 등을 갖추고 있다. 광주에서 산책하기 좋은 곳 중 하나로 알려졌다.

북구건강복지타운 건너에는 무등초등학교와 문화중학교가 나란히 붙어있다. 1988년 3월 21일 개교한 무등초등학교는 면앙로 99번지, 1984년 3월 8일 개교한 문화중학교는 면앙로 111번지다.

▲ 광주 시립 무등도서관 모습

우산근린공원을 바로 지나자 시립 무등도서관이 나온다. 1981년 광주시립도서관 중 처음으로 개관한 무등도서관은 면앙로 130번지다. 개관했을 당시 무등도서관은 자리를 잡기 위해서 새벽부터 도서관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할 정도로 영화를 누렸다.

무등도서관을 지난 면앙로는 동문대로와 만난다. 면앙로가 동문대로와 만나는 사거리는 무등도서관사거리다. 동문대로는 서방사거리에서 시작해 망월동까지 약 6741m의 도로다.

무등도서관사거리를 지난 면앙로는 장열사 뒷담을 지나고, 군왕로를 가로질러 두암동 미라보아파트 앞에서 끝이 난다.

장열사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장군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우다. 장열사의 뒷담이 면앙로에 접해 있으나, 이 곳의 주소는 동문대로 112번길 99번지다. 1850년 지역 유림들이 우치동 죽방촌에 사우를 건립하여 향사해 오다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으며, 1906년 복원됐다. 1975년부터 사우(祠宇) 정화사업을 추진하여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사당과 내삼문, 화랑원을 완공하였고 1981년 전라남도와 광주시 지원으로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해마다 음력 9월 20일에 김유신 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이와 같은 모습을 담고 있는 면앙로는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인 송순의 호에서 이름을 따 온 의미있는 도로이지만 실제 이 도로의 이름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면앙로를 걸으면서 5명의 시민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그 중 4명이 도로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남은 1명이 정확히 도로명과 도로의 주인공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동안의 취재를 통해 드러난 공통점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호를 따 명명된 도로명에 대한 설명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면앙로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왜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이 도로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안내판을 찾을 수 없었다. 무척 실망스럽고 아쉬운 대목이다.

송순, 면앙정가단(俛仰亭歌壇)의 창설자이며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력에 따르면 면앙로의 주인공인 송순은 담양 출신으로 이조판서 태(泰)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다.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俛仰亭)이며, 면앙정가단(俛仰亭歌壇)의 창설자이며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로 알려졌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1520년(중종 15)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마친 뒤, 1524년(중종 19)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1527년(중종 22)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33년(중종 28)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송순은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사사된 뒤 5일 만에 홍문관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집의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어사 등을 지냈고, 1539년(중종 34) 승정원우부승지에 올라 4월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오자 선위사가 되어 서행(西行)하였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사간원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중종 37) 윤원형과 황헌(黃憲) 등에 의하여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7년(명종 2)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중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그해 5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50년(명종 5)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陳福昌)과 이기(李芑)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 보내졌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명종 7) 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 때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제(林悌)가 부(賦)를 쓰고, 김인후(金麟厚)·임억령(林億齡)·박순(朴淳)·고경명(高敬命) 등이 시를 지었다.

이후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1562년(명종 17) 70세의 나이로 기로소(耆老所: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과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고, 1568년(선조 1) 한성부좌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한성판윤으로 특별 승진하고 이어 의정부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사양하고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박상(朴祥)과 송세림(宋世琳)을 사사하였고, 교우로는 신광한(申光漢)·성수침(成守琛)·나세찬(羅世纘)·이황(李滉)·박우(朴祐)·정만종(鄭萬鍾)·송세형(宋世珩)·홍섬(洪暹)·임억령 등이 있다. 문하 인사로는 김인후·임형수(林亨秀)·노진·박순·기대승·고경명·정철(鄭澈)·임제 등이 있다.

전남대학교 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 따르면 면앙정은 그가 41세 되던 해인 1533년(중종 28)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다. 제월봉은 무등산에서 시작하는 한 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어 형성된 언덕이다. 제월봉은 일곱 굽이로 되어 있는데, 그 중 가운데 구비는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길한 이곳에 송순이 증축한 정자가 바로 면앙정이다. 면앙정의 모습은 마치 두 날개를 활짝 펴서 천리를 날아갈 듯한 청학(靑鶴)과 흡사하다.

호남가단(湖南歌壇)을 형성

▲ 면앙정

면앙정은 그 주변에 있는 식영정(息影亭),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등과 더불어 호남가단(湖南歌壇)을 형성하였다. 송순은 호남 사림의 조종(祖宗)인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학통을 계승하여 호남가단의 큰 스승으로 존재하였는데, 그의 면앙정에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송강(松江) 정철(鄭澈), 백호(白湖) 임제(林悌), 소쇄처사(瀟灑處士) 양산보(梁山甫),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聲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사암(思菴) 박순(朴栒) 등 당대에 시문과 학식으로 명망이 높았던 여러 인사들이 출입하였다.

‘면앙(俛仰)’이라는 이름은 “굽어보니 땅이요, 우러러보니 하늘이라(俛有地兮 仰有天兮)”는 대목에서 따온 것으로, 송순이 “면앙우주지의(俛仰宇宙之義)를 취한(寔取俛仰宇宙之義(󰡔俛仰集󰡕 권5, 「行狀」, <議政府右參贊宋公行狀>)” 뜻을 담은 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송순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면앙정에서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의 일체를 형성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즐김으로써 천지자연과의 조화를 궁구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군자의 떳떳한 삶을 추구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맹자(孟子)가 말하는 군자(君子)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남에게 부끄러움이 없음(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孟子󰡕, 「盡心章」))”과 상통한다.

면앙우주지의 세계관을 견지하는 송순은 면앙정을 소재로 총 146구에 달하는 <면앙정가(俛仰亭歌)>를 창작하였다. <면앙정가>는 송순의 문집 <면앙집(俛仰集)>에 한역되어 ‘신번면앙정장가일편(新翻俛仰亭長歌一篇)’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俛仰集> 권4, 「雜著」, <新翻俛仰亭長歌一篇> 참조)

<면앙정가>는 가사(歌辭)의 선구적 작품

<면앙정가>는 그 제작 시기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강호가도(江湖歌道)를 구현한 가사(歌辭)의 선구적 작품이자 누정문학(樓亭文學)의 시초가 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俛仰集)』이 있다. 담양 구산사(龜山祠)에 신주가 모셔졌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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