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6)-금재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6)-금재로
  • 박창배 기자
  • 승인 2016.06.22 2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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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재로에는 이기손 의병장이 없다.

지난해 <시민의소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지역공동체캠페인 사업으로‘함께 길을 걸어요’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로명 홍보에 나선 바 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민의소리>는 광주광역시 도로명 중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명들이 많다는 사실과 함께 왜 이러한 이름의 도로명이 생겨났는지를 모르는 시민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올해 다시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공동체캠페인 지원사업으로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난해 보도를 마친 20개 구간을 제외하고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20개 구간을 중심으로 역사적 인물소개, 명명된 의미, 도로의 현주소, 주민 인터뷰 등을 밀착 취재해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편집자

도로명을 부여할 때 그 지역에 연고가 있는 인물들의 호나 생가마을명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곳에 연고가 있는 인물들이 없으면 어떻게 했을까?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곳에 강제로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고 시간이 지나면 ‘원래 그래’였다고 말할 것이다.

   
 

금재로를 걸었다. 금재로는 유동과 북동을 잇는 감초 같은 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북성중학교 정문옆 길에서 시작하여 수창초등학교 후문과 북동성당을 지나 대인교차로까지 쭉 이어진 길이다. 총연장 869m의 길이지만 알아두면 임동오거리나 유동사거리, 대인교차로에서 막히는 시간대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길이다.

금재로는 금재로1번길, 9번길, 29번길, 36번길, 51번길, 73번길, 75번길로 분기되는 도로의 이름을 갖는다. 금재로1번길과 금재로9번길에는 자동차의 머플러를 수리하는 곳들이 많다. 예전 터미널이 있던 시절에 형성된 거리에는 아직도 자기만의 노하우로 자동차 머플러를 수리하는 기술자들이 있다.

▲ 왼쪽 금재로73번길, 오른쪽 금재로75번길

금재로29번길과 73번길,75번길에도 자동차나 기계를 수리하는 정비소들이 있다.

▲ 금재로에서 바라본 대인교차로

금재로는 왕복 3차선의 큰 대로다. 자동차가 씽씽 달릴 수 있는 곳이지만 대인교차로에서 북성중학교 방향으로 과속을 방지하기 위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금재로가 있는 이 길에는 아쉽게도 금재와 관련된 생가터도 없고, 금재는 이 곳에서 태어난 영웅도 아니다.

금재로, 금재 이기손 의병장의 호에서 따와

금재로의 유래를 찾아보면서 내가 길을 잘못 찾고 있나 생각됐다. 왜냐면 금재 이기손 의병장의 호를 따서 금재로라는 이름을 붙였다는데 전혀 북구와 상관이 없는 이이었기 때문이다.

이기손 의병장의 이야기는 광산구에 많다. 광산구 송정공원에는 이기손 의병장의 의적비가 세워져 있다. 북구청 담당자에게 문의하니 북구에 길이 많아 북구와 연관된 인물만으로 도로명을 부가하지 못해 빌려왔단다.

그래도 금재로라고 이름을 지어 났으면 아무리 연고가 없더라도 도로명을 사용하게 된 사유와 이야기를 알리는 표지판이라도 붙여 놓아야 하는데 어렵게 만든 도로명이 파묻히게 생겼다.

구한말 각 지방에서는 의병들이 일어섰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기손 의병장이 누구이길래 도로명에 이기손 의병장의 호를 새겨 넣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금재 이기손 의병장의 이야기를 소개할까 한다.

이기손 의병장 이야기

▲ 이기손 의병장

이기손 의병장은 1872년 당시의 광산군 지금은 광산구 본량면 장등마을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금재(錦齋)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나이 9세에 그 어렵다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었고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과 1905년 을사조약, 1907년의 고종황제 폐위, 관군해산 등의 국난이 잇따르자 분함을 참을 수 없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여 병서 연구에 전념했다. 1907년 그 나이 31세로 의병의 기치를 높이 들고 광산, 나주, 함평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기삼연(奇參衍), 전해산(全海山), 김태원(金泰元) 의병장과 손을 잡고 호남의 서남부 지방 일대의 상대장(上大將)이 되어 일본군과 분전했다.

임곡면 용진산을 거점으로 그곳에 집결하여 진을 치고 1908년 첫 싸움에서 일본군 100여명을 사살하고 총기 100여점을 노획했으며, 두 번째 접전에서 일본군 70명을 죽이고 아군측은 가벼운 피해를 입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그 뒤 지형이 유리하고 군량미 조달이 용이한 석문산으로 본진을 옮기고, 그곳에서 담양과 창평까지 원정하여 창평 ‘무동촌’에서 일본군 장교 ‘요시다’가 이끄는 군대와의 싸움에서 요시다를 사살하고 일본군 수십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석문산에서 나주 유덕산으로 본진을 옮긴 후, 영광군 대마면 등으로 출격하여 수많은 일본군을 무찔렀으며 영광에서의 전투를 끝내고 본진으로 돌아오던 중 의병을 가장한 무리들이 양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괴롭히는 것을 알고 그 무리들을 처벌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무안군 지도읍에 설치된 일본 해군본부를 습격하기 위해서 100명의 결사대를 조직 파견하여 큰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 사정이 점점 안좋아지자 다른 애국지사와 마찬가지로 망명길에 올랐으나 여의치 않아 26년후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금산에 숨어살며 그 지방 청소년들에게 글과 행동으로 민족의 얼을 심는데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때 당시 그는 차츰 시들어가는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1930년 봄, 금산군 금산면의 온양 이씨 문중을 설득하여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패위된 고종황제와 비운의 마지막 임금 융희황제 두 분을 모실 전각과 순종 황제의 친필을 소장할 어필각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방해로 그 계획이 좌절되자 총독부 앞에서 할복 자살도 불사한 끈질긴 투쟁끝에 허가를 얻어냈다. 이기손 의병장은 은거지인 충남 금산과 고향 광산군을 오가면서 후진교육에 전념하다가 1935년 은거지 금산에서 향년 81세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용맹했던 전적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이기손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의적비가 송정공원에 세워져 있다.

▲ 송정공원에 자리한 이기손 의병장 의적비

 

금재로를 따라 걷다 되돌아 오면서 어쩌면 이 거리가 이기손 의병장의 살아온 삶과 같은 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면 모른데로 지나칠 길이지만 광주시민들이라면 왜 금재로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금재라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 뜻을 한 번쯤 기려봤으면 싶다.

▲ 북성중학교쪽에서 바라본 금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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