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모두가 잘됐으면 하는 아웃사이더
사회 모두가 잘됐으면 하는 아웃사이더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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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낮고 더 작은 곳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지난 9일 대법원으로부터 전남 나주.함평.무안 시군법원 판사에 임명된 광주지방변호사회소속 김동주 변호사(53)를 임명전날 만났다.

50대의 나이에 이른바 '잘나가는' 변호사신분을 접고 향토마을 시군법원판사로 나선 김 전 변호사는 과거 12년동안의 판사 재직기간동안에는 친절하고 원숙한 재판진행과 성실한 자세로, 또 변호사시절에는 성실한 변론활동으로 두루 신뢰를 받아온 전형적인 선비형 법조인이다.

그가 수차례에 걸친 법원측의 요청에 결국 '시골판사'로 부임하게 된 이유는 '사라진 옛 공동체정신을 복원'해보고자하는 평소의 지론때문.

"옛 마을에는 어른이 있어 크고 작은 주민들간 싸움이 있거나 민사분쟁이 일어나면 중재 역할을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공동체가 붕괴되다보니 어른에게 뺨한대만 맞아도, 어린애가 참외 서리를 해도 경찰서나 법원으로 달려가기 일쑤"라는 그는 "시군법원제도의 취지가 화해를 통한 분쟁 해소라는 공동체정신의 복원에 있는 만큼 본뜻에 부합되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어린애가 참외서리만 해도
어른에게 뺨 한대만 맞아도
경찰서가는 세태 안타까워


그는 "당초 제의를 받았을땐 이 제도의 취지에 걸맞는 '원로'도 아닌데다 비록 괴로운 직업이긴 하나 (변호사직을)그만두고 싶지는 않아 망설이기도 했다"면서"그러나 전문인으로서 그동안 배운 지식을 사회에 돌려주는 또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흔쾌히 맘을 바꿨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시군법원은 주로 3천만원이하의 소액사건과 관할 경찰서장이 제기하는 즉결심판사건을 다루는 곳으로 판사의 임기는 10년이다.

김 전변호사는 사시 22회로 지난 82년 의정부지원판사를 시작으로 해남지원,광주지법, 광주고법을 거쳐 95년부터 광주에서 변호사로 활동을 해왔다.

이번 시군판사부임으로 다시 재조(在朝)에 몸담게 된 김 전 변호사는 일부 '명문고-명문대'출신, 특히 '서울 법대'가 '주류'의 3분의2를 차지하고 있는 법조계에서 '검정고시-방통대'출신으로서 후배 법조인들의 귀감이 됨으로써 더욱 주목받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해 겨울,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설움을 안고 무등산에 나무하러갔다가 낫으로 언 손등을 찍어 엉엉 울며 집에 돌아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도 그곳을 지나칠때면 절로 눈물이 나오더군요".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했던 아픈 기억이 지금도 진한 상흔으로 남아있단다.

동네싸움 '말리는' 역 자임
"더 낮은 곳 돌아보는 계기"


그는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외롭지만 열심히 살면서 주류를 포함한 사회모두가 잘되도록 노력하는 아웃사이더'이고자 한다.

그는 뒤늦게나마 학문에 정열을 쏟아 93년 전남대 경영대학원석사, 94년 방통대 영문학과졸, 98년 조선대 산업대학원졸업, 올 방통대 일문학과 졸업 등 다양한 학문적 소양을 쌓았고 환경단체활동과 함께 시군판사 부임직전까지 전남대(민사법),조선대(환경법)에 강의를 나가기도 했다.

박도영변호사(50)는 "김 신임판사는 변호사시절 특히 서민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던 분으로 배우고자하는 정열이 남다르고 후배들에게는 잘하고 윗분들에게는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줬다"면서 "그는 50대의 나이지만 20대의 정열을 가진 분으로 시.군 법원판사로서 지역사회에 봉사하겠다고 나선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고 평했다.

'더 낮게 더 작게'라는 생활신조를 갖고 작은 사건에도 충실하자는 신임 판사의 평소의 소신이 공동체정신의 복원에 어떻게 기여할 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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