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씨구! 친일 아리랑(8)
얼씨구! 친일 아리랑(8)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4.08.28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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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독립운동을 둘러싸고 생긴 급진론과 점진론은 시대를 넘어 군사정권의 학생운동 과정에서도, 학생들이 시국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운동 방향 선택을 둘러싼 논쟁을 유발하였다. 그러한 논쟁 가운데 단재와 도산이 곧잘 거론되었다.
충청도와 평안도로 출생지를 따로 하는 두 사람, 도산은 미국 경험과 기독교 경험을 갖고 유길준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애국 계몽운동에 나선 반면 단재는 14세까지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어 유교가 그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음을 살필 수 있겠다. 그는 일찍이 황성신문 논설위원을 지내고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도 활약하였다.
망국의 위기에 발분한 두 사람은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의 동지였고 도산의 수양동지회의 활동에 단재가 취지문을 쓰고 청도회의에 참가하여 함께 국사를 논하기도 하였으나 그들의 운동의 방향은 급진과 점진으로 갈리고 그 후계자들에 이르기 까지 논쟁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애국 계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근대 수용의 주체역량의 배양에 착목한 도산은 수양회 활동에 이어 흥사단 운동으로 새로운 민족역량을 마련코저 하였다. 그러나 단재는 진화론을 넘는 민족 자강의 입장에서 민족생존을 위한 즉각적인 투쟁에 정신할 것을 주장하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조직운동의 인적 역량의 중요성을 자각한 도산과는, 시대적 대응을 달리하였다.
1913년 도산이 미국에서 흥사단을 발족한 소식을 접한 단재는 ‘유길준이 하던 흥사단 이름을 가져다가 또 다른 파벌을 하나 만들려 하는군’ 하고 평가하면서 도산과 결별선언을 하였다. 하물며 미국의 위임동치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독립을 달성시키려는 이승만의 외교론은 더욱 타겟의 대상이 되었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으로 멸시 하였다.
2.8독립선언과 3.1독립운동이 있기 전 1918년 12월 조국광복을 외치는 중광단의 39명의 독립선언에서 단재는 ‘육탄 혈전하여 독립을 완성하자’고 주장하였다. 그의 최종적 결론은 민중의 폭력적 혁명만이 독립의 길이었던 것이다. 도산은 당장의 독립이 무망함을 절감하면서 국권회복의 방법으로 실력양성을 주장하였다 ‘국가사업을 빈말로만 하지말고 실력을 무시하지 말고 공상적으로 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합시다’고 주장한 그는 독립은 치밀한 계획과 엄밀한 조직을 통한 실제적 준비로 이루어짐을 역설하였다.
그러므로 동포들은 민족사회의 주인의식에 입각한 책임 있는 주권자로 윤리적 개조가 되어야 했다. 1918년 도산이 흥사단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조선이 독립하려면 조선민족이 정신상 독립과 생활상 독립부터 먼저 되도록, 또는 대동단결이 이루어지도록 준비에 노력을 더하고 더함이 가하다 하노라’고 말하여 내실과 준비를 말하고 있었다.
도산이 결코 준비론자에 불과하지 않음을 주장하면서 무장투쟁에 대한 관심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도 하나 그 실재와 실적은 보이지 않는다. 도산의 점진론은 일제하 문화적 민족주의와 그 맥을 같이 하는데, 문화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인사들이 일제의 문화통치에 조응하면서 결국에는 황민화정책의 하수인으로 까지 전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광수 최남선 주요한등이 두드러저, 불행히도 그들은 도산의 추종자이거나 흥사단 단우였다. 이는 도산의 실력양성의 점진론의 한계를 노정한 사례로 인용되는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그 백미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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