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씨구! 친일 아리랑(5)
얼씨구! 친일 아리랑(5)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4.08.0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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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빼어난 민주주의자인 이태복은 2006년 “도산 안창호 평전”을 출판했다. 출판 동기를 설명하면서 그의 흥사단 아카데미 경력에 걸맞게 시중에 회자되고 있는 ‘도산에 대한 왜곡과 일방적인 폄하가 도를 넘어 일제정책에 이용당했다는 근현대사 책까지 등장’ 한 현실에 대한 우려가 집필 동기임을 밝히고 있다.
‘이런 현상을 방치하면 거짓이 진리가 되고 허위가 사실로 굳어질’ 수 있고 이는 ‘온몸과 마음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밤낮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한 위대한 애국자에 대한 도리가 아님’에 발분했음도 내비추이고 있었다.

왜곡과 일방적 폄하 행위는 건강한 시민사회를 위해서도 불식되어야 한다. 하물며 위대한 애국자에 이르러서는 그 송구한 마음에 발명의 사명감을 느꼈을 것에 필자도 깊이 공감한다.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들이 도산과 그의 숭배자 이광수가 걱정한 이 민족의 열근성 때문이었을까 하다가 도산 폄하의 주체들이 도산의 개인적 윤리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의 현실에서 점진적 개량주의를 선양한 데 따른 결과와 상관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미 가버린 일제 강점기 현실과 이를 오늘의 현실에다 겹쳐 천착하다 보면, 유사한 삶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반세기 넘어 분단을 넘어 통일하자고 이야기했고 온몸을 던져 민주화 운동으로 시종했던 열사들과 생령들이 있었음에도 친일의 잔여와 독재의 잔재가 그 모습을 바꿔 새로운 생명력을 보강하면서 그 위력을 사방에 떨치고 있다.

전투적 민주주의자들이 그 과거를 반성하고 신우익의 기치를 펄럭이는 것은 물신숭배의 결과인가 아니면 그냥 민주주의의 승리인가 하는 것도 가늠하기 어렵다. 소위 뉴라이트가 주류 민주세력을 위해서 복무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남북긴장을 강화시키는데 몸부림쳐 제 몫을 다 함을 볼 수 있는데, 남북긴장이 강화된 결과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도정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는 불문가지다.
더욱이 피를 예견시키면서 동족상잔까지도 정당화시키는 남북긴장은 결국 민주주의를 압복하고 한반도에서 퇴출되어야 할 쇠붙이들만 청청 무성하게 만든다. 남북분단이 해소될 기미가 꽉 막힌 체인데 동서의 장벽은 장벽 속에 우쭐대는 사람들에 의해 그 벽은 두터워지고 신장은 높아만 간다.

민주와 독재의 두 구성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진보와 보수의 틀이 선 보이드만, 어느새 좌와 우라는 면목으로 버젓이, 낯설어 하는 그냥 시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새 그 민낯을 과시한다. 문제해결에 대한 완급도 좌와우로 갈리고 일원적인 것과 다원적인 것도 좌우로 도색되어 그 선명성을 과시하면서, 그 부끄러운 허물까지도 일괄 성형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이해관계로 나뉘고 연분으로 갈리고 미래전망에 대한 차이로 이합집산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들은 요만큼 성장했다면서 반려견들의 애정 나눔을 학습하는 가운데, 아뿔사, 세계사적 긴장은 남북긴장에 덧대어, 차일귀신처럼 그 흉폭한 나래를 펼치고 있지 않는가를 돌아볼 일이다. 다시 19세기말처럼.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어쭙잖은 외국의 속담을 상기하면서, 망국의 설움도 분단의 아픔도 진주조개가 고통을 감내하면서 찬연한 진주를 만들어내듯, 참고 견디면서 좌고우빙, 영양분의 소재를 재빨리 간파하는 생잔의 지혜만 있으면 만만세가 아닌가? 평안하고 평탄한 대한민국의 오늘이 증명한다.
오색 주마등에 찬연히 빛나는 너와나 그리고 우리들의 조국. 삶의 조건에 따라 현실 대응이 다르고 그 대응들이 뭉쳐 노선들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오늘 우리들이 만화경 같은 노선을 만들 듯 식민지 조선에서도 그러했을 성 싶고 도산도 어느 한 노선을 대표하지 않았을까 궁구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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