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단상 ⑭ 영창 단식
5월 단상 ⑭ 영창 단식
  • 김상집
  • 승인 2013.09.05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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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집
영창 안의 생활 중 가장 힘든 것은 수감자들이 대변을 보는 것이다. 한 방에 40명이 정원인데 126명을 한꺼번에 수감해 한 사람이 대변 5분이면 10시간 반, 소변은 한번 보는데 2분씩 하루에 4번이면 17시간이 걸린다. 즉 한방의 수감자가 용무를 보는데 걸리는 시간이 27시간이 넘었다. 이 때문에 수감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갈등이 발생했다.

한번은 한 수감자가 변비로 화장실에 오래 있자 기다리다 못한 사람이 빨리 나오라며 용무중인 그 사람을 밖으로 끌어내버렸다. 끌려나온 사람은 수치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서울대 농대 대학원생인 김진환으로 5월 26일 광주의 상황이 궁금해 버스로 정읍까지 왔다가 길이 막히자 정읍서 도청까지 걸어 들어왔다. 하룻밤 자고난 다음날인 27일 새벽 그도 도청에서 함께 포로로 잡혀 들어왔다고 했다.

우리는 더 이상의 불상사가 없도록 대책을 세웠다. 즉 대변은 한 사람이 용무를 보고 있으면 4명 정도는 줄을 서다 곧바로 2분 이내에 일을 보기로 하고, 소변은 30초 이내로 가급적 하루에 2번씩만 보기로 했다.
그동안 불편을 느꼈던 수감자들은 나의 말에 적극 협조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종일 차려 자세와 숱한 구타로 팬티와 엉덩잇살이 엉겨 붙어 있어 용무를 빨리 보려고 팬티를 급히 내리면 살점이 떨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이었다.

군용식기 하나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데 세 숟가락이면 밥이 없었다. 저질의 식사와 적은 양의 식사가 한 달 넘게 계속되자 수감자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처럼 머리카락이 빠지고 체중은 줄어만 갔다. 또한 끊임없는 구타와 옆 사람과 대화조차 할 수 없어 우리는 완전히 동물 취급을 당했던 것이다.

7월 말경, 영창 6소대 소대장을 맡았던 나는 이대로 당할 수만 없다는 생각에 각 방마다 수화로 연락해 단식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런데 낌새를 차린 군인들이 수감자들을 분리해 나를 7소대로 옮겨버렸다.

7소대에서도 나는 한상석, 황금선, 방민원과 함께 단식투쟁을 선언하고 지급된 점심을 밖으로 내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헌병대 형무반장 박춘배 중사가 영창 안으로 들어와 우리들을 지근지근 밟더니 영창마당으로 끌고 갔다.

그는 “허, 허! 니기들이 영창에서 단식을 해?” 하면서 10파운드 곡팽이 자루로 제일 앞에 섰던 나의 목을 정면에서 칼을 베듯 후려쳤다. 정통으로 목을 맞은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계속되는 구타에도 소리 한번 지를 수 없었다.

단식을 함께 했던 동료들도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내가 그렇게 맞고도 소리 한번 지르지 않자 나중에 여러 교수님께서는 영문도 모른 채 “그렇게 맞고도 굴복 않으려고 소리 한 번 안 지르다니 참 용감하네.” 하며 칭찬을 했다. 나는 목이 아파 웃을 수도 없었다.

우리가 단식투쟁을 하고 또 수차례 구타를 당하자 다른 방의 수감자 70여 명이 ‘나도 단식하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생각지 못한 수감자들의 거센 항의에 놀란 그들은 우리에게 요구사항이 뭐냐고 물었다.

우리는 ‘구타하지 말 것, 567그램인 정량 급식을 지급할 것, 책을 넣어 줄 것, 수감자들끼리 대화할 수 있게 할 것, 우리 시민군은 무죄이니 즉각 석방할 것 등 7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그들은 마지막 요구사항인 ‘우리 시민군은 무죄이니 즉각 석방할 것’만 제외하고 나머지 요구사항을 모두 받아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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