욤비 토나, 콩고 왕자출신 난민 ‘대학 교수’ 되다
욤비 토나, 콩고 왕자출신 난민 ‘대학 교수’ 되다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8.01 15: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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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에서 자율전공학부 재직, 가족과 함께 광주생활 시작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난민으로 인정받기도 어려웠지만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지난 2002년 낯설기만 한 한국 땅을 밟게 된 미스터 욤비 토나(46). 7년여 간의 콩고내전으로 끔찍했던 전쟁을 피해서 구사일생으로 콩고민주공화국을 탈출한 그는 배를 타고 한국으로 오게 된 난민이다.

최근 광주대학교(총장 김혁종)는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욤비씨 소식을 듣고 자율융복합전공학부 교수로 초빙했다. 또한 광주대는 욤비씨의 가족이 모두 함께 살 수 있도록 학교 근처 아파트를 제공하고, 연구실까지 제공했다.

욤비 토나, 인권도시 광주 정착

욤비씨의 가족들은 지난달 30일 광주로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됐다. <시민의소리>는 다음날 광주대에서 욤비씨를 만날 수 있었다.

10여년의 힘든 한국 생활 끝에 교수를 하게 된 그는 “아시아 인권 도시라고 알려진 광주에서 최초로 난민 외국인에게 교수자리를 마련해 준 광주대에 너무나 감사해요. 많은 관심과 사랑도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 전에 광주는 5.18민주화 운동으로 알고 있었고, 인권포럼, 컨퍼런스로 2차례 정도 방문한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욤비씨는 정이 깊은 광주 사람들의 모습과 민주·인권에 관심이 많은 광주가 너무 좋은 듯 보였다. 광주에서 보고, 배운 민주·인권문제들로 나중에 돌아갈 콩고에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에 가득차 보였다.

처음 욤비씨는 중국 베이징을 거쳐 배를 타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다. 그는 콩고에서 본인을 포함해 총 4명이 함께 탈출했지만, 3명은 유럽으로 가고 욤비씨만 혼자 중국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난민 인권 상황이 미약했던 중국에서 지내기 어려웠고, 한국으로 가길 결심했다. 처음 인천에 도착한 욤비씨는 택시를 타고 가까운 숙소로 데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흑인으로 피부색과 언어가 달랐던 외국인 욤비씨를 태운 택시는 인천에서 먼 길을 달려 서울 이태원에서 차를 세웠었다.

그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는 평양으로 가는 줄 알았어요. 해외에서는 North Korea와 서울이 수도인 Korea와 같은 나라인 줄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먼 길을 달려 이태원에 도착했고 3일 동안밖에 나오기도 힘든 시절을 겪었어요” 라고 웃지 못 할 일을 회상한다.

생소하기만 했던 한국 생활

처음 콩고와 전부 반대 모습인 한국에서 새로운 언어, 기후, 문화, 음식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힘든 것이었다. 욤비씨에게 가장 놀라운 것은 길거리의 한국인 모습이었다.

벌써 한국에 온지 10여년이 지난 욤비씨는 “처음 도착했을 때 모두 길에서 빨리 빨리, 무조건 빨리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이상했어요. 콩고에서는 천천히 다니고, 빨리 걷고 있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할 정도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지금은 한국 음식도 잘 먹고, ‘~요’ 라고 끝나는 한국어가 너무나 예쁜 언어인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이제는 한국인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원래 욤비씨는 콩고의 작은 부족국가 ‘키토나’의 왕자였다. 또한 그는 킨샤샤 국립대 경제학과, 심리학과 석사학위까지 받고, 콩고 비밀정보국에서 근무하며 부와 권세를 누렸던 엘리트 출신이었다.

엘리트였던 그는 콩고 정권의 비리를 알아채고 야당 민주사회진보연합에 전달하려다 발각되어 갖은 옥고를 치르게 되고, 가족들은 콩고 정글 비밀의 집에 남겨둔 채 목숨을 걸고 콩고를 탈출해야 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욤비씨는 난민으로 인정되지도 않고, 피부색이 까만 불법체류자 신세였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되지 않은 터라 아무런 지원을 받지도 못할뿐더러 공장을 전전긍긍하며 인종차별을 당한 채 월급을 떼이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욤비씨는 지난 2003년부터 인권운동을 시작하고, 난민인권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난민들의 인권문제의 실상을 밝혀냈다. 물론 공식적으로 ‘난민’으로 인정되지 않아 눈을 피해 다니며 힘든 생활을 보내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져갔다.

공식 난민 인정, 6년 만에 가족 재회

그는 콩고에서  머리를 쓰는 일로 돈을 벌었지만, 한국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힘든 막노동, 중노동으로 매일 파스를 붙이며 힘든 생활을 버텨야 했다.

이러한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주변 교회 사람들과 난민인권센터에서는 욤비씨를 돕기 시작했다. 마침내 지난 2008년 공식적으로 난민을 인정받게 됐고, 6년 동안 보지 못했던 욤비씨의 가족들까지 한국으로 들어와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당시를 떠오르며 그는 “처음 가족들이 한국에 왔을 때 저처럼 많이 힘들어했어요. 당시 인천에 거주를 했지만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가족들을 위해 매일매일 서울 이태원까지 가서 콩고 음식을 사다 나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한국 사람과 똑같아요. 입맛도, 생활까지도”라며 빙그레 웃는다.

이후 가족과 함께 살게 된 욤비씨는 소중한 새 생명을 얻기도 했다. 막내 딸 아스트리드를 얻고 나서 KBS 인간극장, 언론보도 등으로 한국 땅에서 사는 난민의 어려운 생활상이 조명 받게 되면서 지난 6월 광주대의 러브콜에 응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무리 하며 욤비씨는 “한국은 빠르게 민주주의를 이루고 인권을 앞 다퉈 챙기고 있지만 여전히 성 평등, 남녀차별 인권에는 조금 부족한 것 같아요. 앞으로 광주대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인권을 챙기는 인권운동가로 광주대 교수로서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 할거에요”라고 환한 웃음을 짓는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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