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백지동맹의 ‘주역’, 진상규명 남긴 채 별세
실제 백지동맹의 ‘주역’, 진상규명 남긴 채 별세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7.25 13: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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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여고보 1회 출신 故人이 된 최순덕 선생

늘 소녀같이 수줍은 미소를 지녔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유일한 마지막 산증인이 지난 7월 22일 우리 곁을 떠났다.

올해 나이 103세의 최순덕 선생은 고령의 나이로 건강마저 쇠약했지만 지난 1929년의 기억을 아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그녀의 타계는 ‘인정받지 못한 진실’이 남아있기 때문에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최 선생의 너무나 고왔던 얼굴은 더 이상 하늘나라에서만 볼 수밖에 없게 됐다.

▲지난해 7월 <시민의소리>와 인터뷰 때의 최순덕 할머니(당시 102세)
부당함에 맞서 정의 실현한 독립운동가

1911년 광주 태생인 최순덕 선생은 광주여고보(현재 전남여고) 1회 출신이다. 그녀가 태어난 당시는 여성으로써 교육을 받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지난 1927년 광주여고보를 입학하고 1929년에는 당당하게 최고학년 반장을 맡을 정도로 똑부러진 성격을 지녔었다.

당시 그녀는 일제강점기에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일본 학생들에게 당한 한국학생들의 부당함을 ‘백지동맹’으로 만천하에 알린 정의를 실현하는 여장부였다.

‘백지동맹’이란 학생들이 시험을 볼 때 답안을 쓰지 않고 백지 상태로 그대로 제출하는 것으로 일본어 교육을 받았던 여학생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비폭력 투쟁방법이었다.

그녀가 이런 백지동맹을 나서서 주도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나주역 통학열차에서 발생한 댕기머리 사건에서 대규모 시가전으로 확대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연장선이었다.

광주 학생들은 11월 3일 시위를 시작하고 중간고사를 앞두고까지 부당함에 대항을 했다. 최순덕 선생의 건강이 정정했던 지난해 취재 당시 “일본 경찰은 지금 광주 우체국 자리에 소방차를 대기해 놓고 물대포를 쏘아댔었지. 11월의 쌀쌀한 바람에 물벼락을 맞은 우리들은 치마와 저고리에 고드름이 달릴 정도였어..”라고 생생한 증언을 한 바 있다.

며칠이 지나 중간고사는 다가왔고, 최순덕 선생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시험을 볼 수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전날 ‘시험지에 한 글자도 쓰지 말자! 연필도 잡지말자! 시험지를 받으면 그대로 덮고 운동장으로 나가자!’라고 150장의 호소문을 만들고 학교에서 남아 있는 동창생들도 독립운동에 함께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최 선생은 그 당시를 떠올리며 “무섭기도 했지만 운동장에 모두 모이니까 든든하고 그렇게 힘이 많이 났다”면서 “여학생이 몸 바쳐 나가 투쟁을 하는데 겁도 없었고 우리 세상이 된 것만 같았다”고 말했었다.

끝내 독립유공자 되지 못해 안타까워

하지만 정의를 외치던 그녀는 첫 번째 무기정학 통보를 받게 되고, 첫 번째 강제 퇴학 처분을 당하게 됐다. 이후 자연스레 22살의 나이에 결혼을 하고 평범한 가정을 살아가던 최 선생은 가슴 먹먹한 소식을 듣게 됐다.

당시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동창생들은 정부에서 이미 백지동맹의 주역이라는 타이틀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주고 그녀는 역사적 올바른 진실이 바로 잡혀지지 않는 것에 쓴 눈물을 머금어야 했다.

백지동맹의 주역이 뒤바뀐 것을 보고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국가보훈처에 두차례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최순덕 선생은 증거불충분, 활동부족이라는 간단한 통보에 더욱 애통했다.

8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국가는 제대로 진상 조사를 재조명하지 않고, 언론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인용하여 오보를 하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7월 <시민의소리>와 인터뷰했었던 최 선생은 “올바른 것을 인정해주고 헛된 것을 잡아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이 정부에서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며 “사실 확인조사도 하지 않고 의문조차 갖지 않는 나라의 대응이 서글프다”고 말한바 있다.

결국 세월의 무게는 그녀의 마음속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건강마저 쇠약해지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지난 22일 오전 10시경 안타깝게 세상과 이별을 하게 됐다.

그렇게 최 선생의 빈소가 마련된 한국병원에서 만난 하나뿐인 딸 이재순씨는 “어머니는 눈을 감는 직전까지 형제간들을 전부 불러 모으시고,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셨다”며 “아직도 국가에서 아무런 답이 없는 것도 애석하지만 어머니가 편안히 가셨을지 걱정이 된다”고 우리 사회를 더욱 씁쓸하게 만들었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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