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단상 ⑥재무장 결사항전
5월 단상 ⑥재무장 결사항전
  • 김상집 5.18민주유공자회 설립추진위원장
  • 승인 2013.07.19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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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집 5.18민주유공자회 설립추진위원장
5월 22일 아침 이명자, 윤경자 등 예비검거된 형수들과 윤만식, 임영희, 김윤기 등 극단 광대팀과 윤상원, 김영철, 정유아, 이행자(이윤정 전 시의원) 씨 등 모든 선후배, 친구들이 속속 녹두서점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불과 십여 명에 불과했다. 우리는 뒷방에 들어가 앞으로의 대책을 숙의했는데 의견이 엇갈렸다.

한쪽은 “지금 운동권이 한 명이라도 모습을 나타내면 광주 운동권은 모두 작살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쪽은 “이런 큰 대중봉기에서 포기하면 말도 안 된다. 끝까지 싸우자”고 했다. 나는 끝까지 싸우자는 입장이었다.

한편 도청 앞 분수대에서는 정시채, 최한영 등이 나와 무기수거와 질서를 호소했다. 오전 12시경 우리는 많은 논의 끝에 일단 지속적인 투쟁을 계속해나가기로 했다. 윤상원형은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자면 시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전남대 학생들이 나서서 노란 전남대 스쿨버스를 타고 확성기를 설치하여 방송하면 효과적일 거라고 제안했다.

왜냐하면 21일에는 여성 두 명이 가두방송을 하다 그 중 전춘심씨가 간첩으로 몰려 시민군(조봉환 등)의 손에 의해 보안사에 넘겨지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진실을 알리려고 방송하다 거꾸로 시민군의 손에 의해 보안사로 넘겨질 판이었다. 마침 내가 버스를 운전할 줄 아니 전남대로 가서 스쿨버스를 운전하기로 하고, 서점에 있던 서대석, 윤상원, 이행자(이윤정 전 시의원), 정유아, 이현주, 박정열. 최인선, 김영철, 김광섭, 나, 이렇게 10명이 봉고차를 타고 전남대로 갔다.

전남대 본관 앞에는 스쿨버스 기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우리가 차를 타고 도착하자 그중의 한 사람(김태진 교수, 당시 전남대 학생처장)이 우리들을 보고 “뭣 하러 왔소?”하고 물었다.

“스쿨버스를 가지러 왔는데 책임자 없어요?”
“당신이 누군데 스쿨버스를 가지러 왔소?”
나는 윤상원형이 만들어준 도청 상황실 출입증을 보여주었다. 그냥 네모난 종이에다 도청에 있는 꽤나 큰 도장을 찍은 다음 윤상원형이 아무렇게나 대충 사인을 한 종이였다.

“도청 상황실에서 차가 필요하니 차를 가져가야겠습니다. 차를 찾으려면 이 증을 가지고 도청으로 와서 찾아가시오”
그래도 차열쇠를 주지 않자 나는 대강당 앞에 세워진 차로 다가가 운전석 유리창을 돌로 깨버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 차의 키가 없었지만 나는 군대에서 배운 실력으로 키박스를 뜯어 가볍게 시동을 걸 수 있었다.

곧바로 앰프를 설치하려고 계림전파사로 갔으나 앰프가 없었다. 마침 광주고등학교 방송반 출신인 김광섭(당시 서울공대 3년생)이 광주고등학교로 가자고 하여 우리는 광주고의 방송 기자재를 끄집어내어 차에 방송시설을 했다. 그리고 대인시장에 도착한 우리는 검정천과 광목을 사서 정유아, 이행자(이윤정 전 시의원)를 비롯한 몇몇 여자들이 검은 리본을 만들고 최인선, 서대석, 박정열, 이현주 등은 가두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5.18기간 내내 군부의 동향과 미국의 동향에 대해 계속 전화로 연락을 해주신 분이 있었다. 당시 전남대학교 사회학과의 김상형 교수님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상형 교수님은 매일 아침이면 고교 동기인 보안사 홍대령방으로 들어가 보고 동향을 듣고 있다가 잠시 밖으로 나와 녹두서점으로 전화해 알려주었다.

5월 17일부터 광주일원에 투입된 공수들이 7공수이며, 경찰은 이미 지휘권을 박탈당했고, 광주시민들의 죽음을 불사한 저항으로 7공수들은 이미 전투능력을 상당히 상실하였다는 것과 곧 3공수와 11공수로 교체될 것이며, 그 사이에 31사단병력이 곧 대체하리라는 것 등이었다. 김상형 교수님은 전화를 걸어 “나야, 듣기만 해”하시면서 소식을 전해주었다.

정보계통에 친한 친구가 있어서라고 말씀하셨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투사회보를 제작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투사회보를 신뢰했다. 그러나 제작에 한계가 있어 아쉬웠는데 이제 가두방송으로 일거에 광주시민 모두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매일 분수대에서 궐기대회를 열었는데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를 낭독하며 무기회수 결사반대를 주장했다. 그러나 궐기대회 중에도 도청 안에서는 무기회수를 계속하고 있었다.

24일 오후 2시 반경 함평 나산 이양현형 집으로 피신했던 정상용, 이양현, 김성애 등이 서점으로 돌아왔다. 정상용, 이양현형은 그 동안의 상황을 들은 다음 윤상원형과 논의를 하여 향후 조직적으로 대처하여 현재의 수습위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홍성담, 임영희 등은 국세청 안에서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고, 이현철, 김광섭 등은 녹두서점 뒤뜰에서 전두환 화형식을 하기 위해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나는 전남대 스쿨버스를 타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궐기대회 홍보와 우리가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확신에 찬 내용의 말도 전했다.

오후 3시 궐기대회가 시작되자 나는 차에 설치된 마이크를 도청 분수대 연단에 설치했다. 궐기대회 후 ‘대학생들은 YWCA앞으로 모여라’는 광고도 했다. 이날의 궐기대회도 시민들의 많은 호응 속에 성황리에 끝났다. 도청 안의 수습위원들은 우리들을 소위 ‘강경파’라 불렀다. 궐기대회 후 YWCA에는 신영일, 김정희 등 1백여 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였다. 곧바로 우리들은 YWCA팀을 결성했다.

우리는 일의 진행상 녹두서점의 공간으로는 좁다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YWCA로 옮기기로 했다. YWCA 총무이신 이애신 총무님께서 YWCA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투사회보팀도 25일부터 YWCA로 옮겨오기로 했다.

밤이 되자 정상용, 이양현, 윤상원, 김영철, 윤기현, 박효선, 김광섭, 안길정 등 우리는 보성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논의를 통해 내일 당장 도청에 들어가 현 수습위원회의 퇴진 및 재편을 요구하고, 재야 어르신네들은 정상용형이 연락하여 25일 11시 YWCA에 모시기로 합의하였다. 큰형수(정현애 시의원)를 비롯한 송백회 여성팀은 대자보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박효선 형과 나는 궐기대회 및 가두방송, 윤기현형은 국제적십자사와 연락하여 의료장비 확보 및 고립된 광주와 외부와의 연락을 맡았다. 정해직형은 행방불명자와 사상자 등의 신상파악을 맡았다.

5월 25일 평소와 다름없이 버스를 타고 궐기대회 홍보를 한 후 궐기대회가 시작되자 분수대에 마이크를 설치했다. 이날 사회는 김태종, 이현주, 김선출, 김윤기가 보았다. 시민들의 호응은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쓰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이날 YWCA내에서 기존의 수습대책위원회와 우리들을 중심으로 한 YWCA팀과의 조우가 있었다. 우리는 확실히 총기회수 반대의 입장을 천명했다. 오후6시경 ‘대학생은 YWCA로 모여라’는 가두방송을 듣고 YWCA 앞으로 1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나는 10명을 1개 분대로 하여 10개 분대를 조직하고 정연효(멕시코 파견 선교사), 채영선(광주시청 공무원) 등 군대를 갔다 온 학생들로 분대장을 임명한 다음 도청 안에 있던 윤상원형에게 연락했다. 1백여 명의 학생들에게는 곧바로 총기가 지급됐고, 초소에 배치됐다. 본격적인 재무장 결사항전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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