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단상 ⑩ 초주검
5월 단상 ⑩ 초주검
  • 김상집
  • 승인 2013.07.1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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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집

녹두서점에서 잡혀 줄줄이 포승에 묶일 때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거니 생각했다. 정말이지 6·25 때처럼, 아니 5·18 기간 동안 공수들이 민간인을 죽이고 몰래 파묻은 것처럼 어느 골짜기로 끌고 가 총으로 갈긴 뒤 그대로 땅에 파묻을 걸로 알았다.
그날 허리띠를 풀고 신발도 벗기고 굴비처럼 줄줄이 묶여 갈 때 방송 카메라가 따라오는 것을 알고, 어떻게든 내 얼굴이 찍히길 바랐다. 계엄군들은 우리들을 연행할 때 모두 고개를 숙이게 하고는 마지못해 KBS에게 촬영을 허용하곤 했다.
매년 5·18이면 KBS에 나오는 단골화면이다. ‘제발 내 얼굴만이라도 찍혀졌으면·····. 내 시체는 못 찾더라도 내가 이렇게 잡혀갔다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졌으면·····’ 하고 힐끗힐끗 고개를 돌려 카메라 쪽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개머리판이 뒤통수와 등짝을 찍는 바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들은 태평양 화장품 건물 옥상으로 우리를 끌고 갔다. 우리는 옥상 난간 아래에 무릎을 꿇리고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런 채로 그들은 다시 촬영을 허락했다. 방송카메라가 떠나자 다시 구타가 이어졌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으면서도 옥상 한 켠에 무릎 꿇고 있는 정현애 형수와 형수 동생 정현순이 놀랄까봐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들은 형수님과 형수 동생, 나 이렇게 녹두서점 식구들만 따로 구분하더니 본격적으로 팼다. 계급장은 보이지 않는데 장교인 듯한 놈이 “너 몇 놈 죽였어?” 하는데 놈의 눈엔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놈에게 얼마나 맞았는지, 그대로 죽겠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우리를 연행한 군인들은 무전 연락을 받고 녹두서점 식구들을 서석병원 옥상으로 끌고 갔다. 거기서도 구타가 이어졌다. 팔 다리 엉덩이 가슴과 배 등 봐 주는 곳이 없었다. 맞은 데를 맞고 또 맞았다. 맞다보니 어느 때부턴가는 머리끝이 찌릿찌릿하여 숨을 쉴 수가 없고 몸을 가눌 수가 없다.
그러다가 얼마 뒤 사복차림이 나타나 우리를 시청 지하실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도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놈들은 손이 뒤로 묶인 우리를 “박아!” “일어섯!”을 몇 차례 시키더니 원산폭격 자세를 시켜 놓고, 앞에서부터 한 사람씩 일으켜 세워 에누리없이 팼다. 예닐곱 명이 따로따로 한 사람씩을 맡아 패는데, 쓰러져서 꼼짝을 안하면 다음 사람을 세워 놓고 팼다. 대부분의 시민군들은 시청 지하실에 끌려오기 전에 이미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계림초등학교 부근 전투에서 계엄군 동료 누군가가 죽은 모양인데, “네 놈이 죽였지?” 하며 노려보는 핏발 선 눈들에는 살기가 있었다. 꽤 넓은 지하실인데 앞에서부터 맨 뒤까지 패고 또 패고 이렇게 서너 번을 돌아가며 줄창 맞았다. 많은 시민군들이 견디다 못해 고꾸라지면 그들은 쭉 뻗어 버린 사람들의 뒤통수를 마치 작살로 물고기를 찍듯이 개머리판으로 내리찍었다. 죽지 않으려면 일어나야 했다.
어느 시민군이 엎어져 개머리판에 맞고서도 꿈쩍을 않았다. “야, 물 떠와.”그들은 양동이 물을 쫙 끼얹었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뻗었네.” 하고는 다리를 잡아 밖으로 질질 끌고 갔다. 쓰러진 사람은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시멘트 바닥에는 구타시에 튄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양동이 물이 바닥에 쏟아지자 한 시민군이 핏물 섞인 시멘트 바닥의 물을 혀로 핥았다.
나는 시멘트에 대가리 박은 상태로 눈을 감았다. 그가 민망하게 여길까봐 시선을 피해 준 것이다. 아침부터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 몇 시간 동안 손목을 포승에 묶여 원산폭격을 하고 있었고, 가슴과 배, 팔과 다리 등을 연타당하면서 나는 초주검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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