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이 없으면서 권력을 누린 재상의 최후
능력이 없으면서 권력을 누린 재상의 최후
  • 이상수 전 호남대교수/시민기자
  • 승인 2013.05.22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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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 출신의 주원장(朱元璋, 洪武帝)은 고려 귀족 청주 한씨의 노비 출신으로 신분의 제약을 느껴 서해를 건너 지나대륙(支那大陸)으로 이주하여 홍건족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다.
1354년, 주원장은 군사를 이끌고 저주(滁州)로 진군하는 도중에 1314년 봉양(鳳陽)의 소지주 가정에서 태어난 이선장(李善長)의 고향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주원장의 위세와 명망을 익히 들어왔던 이선장이 자신을 부하로 받아달라고 요청하자 기꺼이 맞아들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확실한 목표나 방향이 세워져 있지 않았던 주원장은 이선장의 말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는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부터 주원장은 황제가 되어야겠다는 신념과 목표를 확실히 다지게 되었고 아울러 이선장을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
이선장은 문치에 뛰어난 기량을 과시했을 뿐 아니라 무공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지모를 발휘했다. 그는 주원장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응천부(應天府)의 정치와 경제를 주도면밀하게 관리했고 초한전쟁 시기에 소하(蕭何)가 한중을 지켰던 것처럼 주원장을 위해 아낌없는 충성을 다했다.
1368년, 주원장은 남경에서 정식으로 황제라고 칭하고 국호를 대명(大明)이라 했다. 주원장은 개국공신이며, 앞날을 예측하는데 아주 뛰어난 유기(劉基)에게 이선장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선장은 개국공신이자 원로로써 여러 대신들을 잘 조화시킬 수 있는 인물입니다. 단지 뜻은 큰데 능력이 부족해 뒷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분이지요.”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주원장은 이선장에게 개국에 필요한 모든 의식을 주재케 하였다. 이로써 그는 일개 말단 관원에서 개국공신으로 성장하여 개국보운(開國輔運) 한국공(韓國公)에 봉해졌다.
하지만 이선장은 겉모습은 관대하고 넉넉했지만 식견이 높지 못하고, 속이 좁고 고집스러웠으며 자신만을 사랑하고 남을 미워했다. 따라서 말기에 참의 이음빙(李飮冰)과 양희성(楊希聖)이 자신에게 무례했다는 이유로 코를 베고 가슴살을 도려내는 혹형을 가하기도 했다.
그의 치졸한 행위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회하(淮河) 출신의 세력을 키움과 동시에 일개 지현 출신인 호유용(胡惟庸)을 승상으로 발탁했다. 그러나 호유용은 권력을 이용하여 뇌물을 챙기는 등 갖가지 부정부패를 저질러 조정과 민간의 원성이 자자했고 정직한 대신들의 비난을 샀다.
이에 호유용은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려고 비밀리에 모반을 준비하여 주원장을 궁궐 밖에서 시해하려다가 오히려 참수되었고, 이선장은 개국공신으로 관직만 박탈당하였지만 후에 별자리에 이상이 생기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를 구실로 황제로부터 사약을 받는 최후를 맞고 말았다. 당시 나이 77세였던 이선장뿐 아니라 70여 명의 가족들이 함께 사약을 받았다.
이처럼 능력이 없는 자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면 스스로 치욕을 얻게 되고 심하면 몸도 망치고 집안도 망하게 되며, 군주도 작은 인재를 크게 쓰다가는 일과 사직이 위태롭게 된다는 교훈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흔히 ‘인사가 만사’라고 한다. 능력이 있는 자를 영입하여야 주어진 목적을 도달할 것이다. 능력이란 업무수행능력은 물론 도덕적 품성도 함께 포함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이번 대통령 방미 도중 고위공직자의 성추문 사태로 국가 품위를 크게 훼손시킨 ‘윤창준 사건’을 보더라도 공직자의 도덕성은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나쁜 본성(本性)은 평소에 감추어져 있다가 자제력이 부족할 때 튀어나오기 때문에 인사청문회 시 업무수행능력 못지않게 도덕성 검증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인사청문회 대상은 물론 비대상자의 자체 도덕성 검증은 더 강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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