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단상 ③이별에 부쳐
5월 단상 ③이별에 부쳐
  • 김상집 5.18민주유공자회 설립추진위원장
  • 승인 2013.05.15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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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집 5.18민주유공자회 설립추진위원장
1980년 12월경 어느 날, 날마다 면회를 오던 여동생 현주가 이학영 선배의 어머니께서 찾아오셔서 ‘이학영 선배를 면회했는데, 내 얼굴을 보고 싶다’면서 같은 시간에 면회를 신청해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나도 같은 광주교도소 4사에 갇혀 있었지만, 이학영 선배는 남민전 사상범이라 하여 3사 독방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말만 들었지 도통 얼굴을 마주본 적이 없었다. 또 우리는 당시 미결수였기 때문에 원래 1, 2사에 수감되어야 했지만 오월항쟁으로 수감된 사람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기결사인 4사 상하 24방을 모두 쓰고 있었는데, 미결수라 하여 기결수와의 접촉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대신 우리는 미결수로서 날마다 하루에 한 번씩 면회를 할 수 있었지만, 이학영 선배는 기결수였기 때문에 한 달에 겨우 한 번 면회를 할 수 있었다. 내가 1977년 8월 군에 입대한 후로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라도 함께 면회신청을 해서 얼굴이라도 보잔다고 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1980년 12월 말경 어느 날 면회를 나갔는데, 3사 입구에 이학영 선배가 서 있었다. 드디어 얼굴이라도 보는가 싶고 반가워서 “형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했는데, 고개를 돌리고는 알은 체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머쓱해서 그대로 교도관 인솔 하에 함께 면회실로 걸어갔다.

면회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실에 나란히 앉았는데도 이 학영 선배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이 없었다. 잠시 후에 교도관이 면회순서에 따라 호명하며 왔다갔다하자 갑자기 이학영 선배가 발로 내 발을 톡톡 치는 것이었다. ‘아, 이제 알은 체 하려나 보다’ 하고 웃으며 고개를 돌려 이학영 선배를 쳐다보았는데, 웬걸 시선을 저쪽으로 한 채 조용히 앉아있는 것이었다.

뜨악해진 나는 다시 자세를 고쳐잡았다. ‘원래 교도소에서는 이렇게 서로 보아도 알은 체 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만 스쳐지나가듯 만나는 건가 보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감방 선배인 이학영 선배와의 만남을 소중히 간직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또다시 이학영 선배가 내 발을 톡톡 건드리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바짝 긴장되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초식인지 알 수 없어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발을 굽어보니 언뜻 이학영 선배의 양말을 신은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 사이에 똘똘 말은 종이조각이 보였다. 이학영 선배는 여전히 시선을 저쪽으로 하고 있었다. 나는 교도관의 눈을 피해 얼른 종이조각을 집어 내 양말 사이에 감추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우리는 헤어졌다.

감방에 돌아와서 쪽지를 펴보니, 위의 ‘이별에 부쳐’란 시와 또 하나의 제목이 없는 시가 또박또박 연필로 씌어 있었다. 감방 안에서 우리는 이 시를 돌려 읽으며 며칠 동안이나 토론에 빠졌다. 그때는 한 방에 17명 정도 있었는데, 재판날짜만 기다리며 하루종일 책만 읽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학영 선배가 보내준 쪽지에 5․18을 ‘전라민중무장봉기’라 명명하고 있었으니 모두가 5․18에 대해 한 마디씩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우리 모두는 5․18을 ‘전라민중무장봉기’라 명명하기로 동의하였다. ‘광주사태’도 ‘광주의거’도 아닌, 또한 이 포로가 된 현실이 보여주듯 ‘혁명’도 아닌 상황 그대로 ‘무장봉기’라 하자. 이 ‘무장봉기’는 군부정권이 부르는 ‘광주사태’라는 말과 달리 광주만이 아닌 전라남북도에 걸쳐 모든 민중이 함께 하였으므로 ‘전라민중무장봉기’라 하자.

나는 이 시를 밖으로 내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공동번역 성경 이사야서에 한 장에 한 줄씩만 연필로 희미하게 써내려갔다. 면회를 온 여동생 현주에게 ‘성경책을 다 읽었으니 찾아가라’며 눈을 깜짝깜짝거리며, ‘이사야서를 읽었더니 매우 감동적이더라. 너도 한 번 읽어봐라.’고 말했다. 여동생 현주는 금새 알아들었는지, ‘그래 나도 꼭 읽어볼게’ 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면회를 와서는 ‘오빠, 이사야서를 감명깊게 읽었어요’ 하였다. 이렇게 위 시를 밖으로 내보냈고 여러 사람들이 읽게 되었다. 그 성경책을 오랜만에 다시 펴고 이 학영 선배의 시를 옮기며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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