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단상 ② 5·18은 민중무장봉기
5월 단상 ② 5·18은 민중무장봉기
  • 김상집 5.18민주유공자회 설립추진위원장
  • 승인 2013.05.0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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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집 5.18민주유공자회 설립추진위원장

5·18은 전라민중무장봉기이며 전라남북도를 해방구로 만들었다.
1981년 4월과 6월 사이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기록된 5.18~5.27 기간 동안을 정리하면서, 나는 이양현 선배 등과 상의해 5·18의 핵심이라 할 ‘재무장 결사항전’의 내용을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 1981년 4월 대법원의 판결이 확정된 후 우리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지만, 아직도 감옥에는 수십 명의 '내란수괴'와 '내란주요임무종사자'들이 갇혀 있었고 여전히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실이라는 명분 때문에 사형집행을 촉발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조봉훈 선배의 주도로 소준섭과 함께 우리는 일단 5.18의 객관적인 사실만을 기초로 하여 학살과 만행, 무장과정, 해방구와 최후 항전과정을 정리하게 되었다. 사찰요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 12시가 넘으면 한얼서점(형과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녹두서점을 한얼서점으로 상호를 바꿈. 당시에는 사레지오고 정문 앞으로 이사)을 빠져 나와 신안동 골목끝 허름한 자취방에서 새벽까지 기억을 더듬어 자료를 정리하였다.
이렇게 내가 출소하여 4월 중순부터 6월말경까지에 걸쳐 5.18일부터 28일까지의 전개과정을 정리할 수 있었다. 뒤에 알았지만 이 작업은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6월 하순경 시내 주택가에 새벽이면 5월 투쟁과정이 상세히 기록된 유인물이 뿌려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유인물을 입수하여 읽어보니 바로 내가 정리한 내용 그대로였다.

조봉훈 선배가 밤마다 정리하고 있는 자료를 밖으로 내보내 누군가가 유인물을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유인물을 뿌리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줄줄이 잡힐게 뻔했다. 투사회보 등 소중한 자료들이 일거에 사라질 판이었다. 황급히 이양현, 정용화 선배와 상의하여 신안동 비트(비밀아지트)에서 조봉훈 선배 모르게 우선 원본을 전부 회수하고, 1부를 복사(들불 형제인 김성섭이 전대입구 복사집에서)하여 복사본만 남겨두고 정용화 선배에게 자료를 넘겨주었다.
극적이게도 바로 다음날 조봉훈 선배는 체포되었고 나는 서울로 떠나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다. 1982년 3월경에야 광주로 내려와 원본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조서를 쓴 후 훈방 조치되었다. 후일 이 자료들을 정용화 선배가 전청련 사업으로 이재의 등이 보강 정리하여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나는 1980년 5월 27일 505보안대를 거쳐 밤늦게야 상무대 영창 6소대에 수감되었다. 작신작신 두들겨 맞아 정신이 없었는데, 그 작은 방에 120명이 넘는 ‘포로’ 가운데 누군가가 내게로 기어오며 ‘상집이 형’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이 들었던 것 같다. 들불 형제 윤순호와 나명관이었다.
잠시 후에 이양현 선배도 같은 소대에 갇혀 있는 것을 알았다. 이양현 선배는 어깨에 부상을 당하여 피가 흘러 있었다. 그때 이양현 선배를 통해 윤상원 형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그때 이양현 선배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또 여기서 몇 사람이 사형 당할지 모르니 조서를 잘 쓰라”는 말을 해주었다. 길고 몸서리치는 조서 투쟁이 시작되었다. 정말 조서투쟁을 잘했는지는 모르나 내란수괴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김종배, 홍남순, 정동년….
결정적인 사실은 ‘재무장 결사항전’의 내용이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투사회보나 도청 앞 분수대 궐기대회의 내용은 ‘재무장 결사항전’이지만 ‘녹두서점팀’, ‘YWCA팀’의 모의과정에 ‘재무장 결사항전’의 내용을 발견할 수 없었다. 도청 수습대책위원회의 조직표에도 정상용, 윤상원은 부위원장이나 대변인으로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광주지역 운동권을 수괴로 만들 수 없었다.

다행스런 일은 대학생과 예비군을 모집하여 총기를 지급하고 총기교육을 시켰던 시민군 대장을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당시 수사관들이 총기교육을 한 시민군 대장을 발포명령권자로 간주하여 사형 1호로 지목했음). 더욱이 1980년 5월 26일 저녁 7시경 수습대책위원회에서 “수습대책위원회를 민주투쟁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위원장을 김종배에서 정상용으로 결정”했던 내용도 더 이상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서야 그런 내용이 있었다 하더라도 5·18의 전개과정이 달라졌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당시에는 어떻게든 ‘재무장 결사항전’의 주체들을 엮어 무더기 사형을 시키려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했던 조서투쟁의 내용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981년 4월 대법원의 판결이 확정된 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출소하여 6월말까지 5·18의 전개과정을 정리하면서 '재무장 결사항전'의 내용을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여파는 1980년대 내내 계속된다. 다행히 한사람의 사형집행도 없이 모두 석방되었지만, 5·18 진상규명과 민주화투쟁과정에서 ‘민중무장봉기’라는 성격규정에는 소홀히 하게 된다. 한때는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5·18민중항쟁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5·18민주화운동으로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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