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단상 ① 해방 광주는 아무도 모르게 왔다
5월 단상 ① 해방 광주는 아무도 모르게 왔다
  • 김상집 5.18민주유공자회 설립추진위원장
  • 승인 2013.05.0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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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집 5.18민주유공자회 설립추진위원장

이 얼마나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1980년 5월, 광주의 운동권에서 어느 누구도 해방 광주가 올 지 미리 알지는 못했다.
1980년 5월 5일 어린이날, 송백회가 중심이 되어 민청 선배들을 중심으로 70년대 여러 부문에서 활동을 하였던 선후배들이 ‘가족동반 야유회’로 식영정 뒷산에서 모였다. 나는 군대에서 갓 제대하였으나(1980년 5월 1일 육군병장 제대), 고등학교 때 데모 좀 했다고 끼게 됐다.
박형선 윤경자 부부께서 데모 하려면 힘내야 한다고 보양탕을 솥단지로 끓여와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박형선 윤경자 부부께서는 그 후에도 운동권 식구들이 모이면 항상 보양탕을 끓여왔다).
이날 모임은 담당형사들의 눈을 피해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어린이날이라서 모두 아이들 데리고 놀러간 척 하며 식영정 뒷산에 모였고, 나와 김윤창, 박석면 등은 우리를 감시하는 눈이 없나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며 모임을 진행했다.
먼저 신혼부부로 위장하여 2박3일간 사북탄광에 가서 갱부들의 투쟁과 계엄군의 진압과정을 조사하고 온 청계피복노조 노동자 두 분의 보고가 있었고, 윤한봉 선배께서는 1979년 11월 YWCA 위장결혼식장의 시국선언문으로 잡혀간 ‘함석헌, 김대중, 김영삼 … 등등’의 사람들이 남한산성(군부대 감옥)에서 당했던 수모와 고초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현 시국에 관해 토론하였는데, ‘전두환 신현확의 집권시나리오’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노동자, 농민, 학생, 종교계, 언론인, 문인…. 등 민주인사들의 투쟁현황과 전망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전두환과 신현확은 최규하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세워 놓고 겉으로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말하고 있으나 국민투표를 통해서는 3김의 적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향후 정치일정을 파기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통대(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선거를 통해 집권하리라 예측하였다.
문제는 ‘비상계엄 확대’의 명분과 시기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18년 장기독재가 궁정동 피살로 막을 내림에 따라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노동자, 농민, 학생 등 각계각층의 민주화 시위가 널리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정국혼란과 간첩단사건, 휴전선총격사건 등을 발표하며 비상계엄을 확대할 것으로 보았다.
발표 시기도 박정희의 양자임을 자처하는 전두환인 만큼 5.16군사쿠데타를 기념하여 거사를 일으키리라 보았기 때문에 광주운동권은 물론 전국의 민주화운동세력은 5.16을 앞두고 시시각각 의견을 주고받으며 초긴장 상태였다.
물론 이날 모임에 대해서는 사찰요원들도 전혀 몰랐기 때문에 5.18수사과정에서도 일체 거론되지 않았다. 막바지에 문승훈이 붙잡히면서 전남대 총학 기획실의 회의록인 ‘자유노트’까지 압수당해 위의 내용도 잠깐 거론된 적이 있어 바짝 긴장했으나, 그때는 이미 수괴를 정동년 선배로 각본을 짠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논의 과정에서 전두환 신현확의 집권음모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거의 확실하였다. 단지 비상계엄을 확대하게 되면 국민의 저항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또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민주화열기를 진압하려면 경찰병력으로는 불가능하고 계엄군을 동원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국군통수권이 미국에 있기 때문에 계엄군의 동원에 대해 미국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전 국민의 저항을 막을 수 없게 되어 전두환 신현확은 퇴진하고 향후 정치일정에 따라 민주정부가 수립되기를 희망하였다. 이것이 5.18 당시 ‘재무장 결사항전’의 핵심이다.
그러나 5.18 전개과정에서 논의하겠지만 아무도 해방 광주가 올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한 사람은 없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고 더구나 비상계엄치하에서 해방 광주는 민중의 무장봉기 없이는 불가능했다. 5월 21일 민중은 무장을 하였고, 해방 광주를 일궈냈다. 새벽처럼 찾아든 해방 광주!
그러나 5월 5일 식영정 뒷산에서 모였던 사람 중 10여명은 이미 예비검속 되었고 예비검속 명단에 들어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피신하였다. 남은 사람들은 5월 18일부터 계속 시위를 주도하다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앞 발포와 상무대 군 병력 진입소식을 듣고 ‘죽지 말고 살아서 만나자’며 뿔뿔이 흩어졌다. 해방광주가 열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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