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5·18, 6월 항쟁
4·19, 5·18, 6월 항쟁
  • 김상집 5.18민주유공자회 설립추진위원장
  • 승인 2013.04.18 13: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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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민주혁명의 단초인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집단시위는 광주에서 먼저 시작됐습니다. 4·19혁명의 첫 투쟁지는 광주입니다.”

4·19민주혁명 국가유공자 조계현(76)씨는 지난 3월 26일 열린 ‘호남 4·19혁명 재조명 심포지엄’에서 “광주에서는 마산에 3시간여 앞선 1960년 3월15일 낮 12시45분께 ‘민주주의 장송(葬送) 데모’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제4대 국회 민주당 이필호 의원의 보좌관이었던 조계현씨는 3월 15일 아침 민주당 참관인들이 투표소 입장을 거부당하는 등 부정선거가 목격되면서 1960년 3월15일 낮 12시45분께 광주시 동구 금남로3가(구 광주은행 본점)에서 1,200여명의 당원, 시민이 모여 ‘민주주의 장송 데모’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광주 3·15의거는 마산의 1차 3·15의거(3월15일 오후 3시30분) 보다 3시간여 빠른 것이며 이는 4·19혁명의 원류가 광주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당시 언론에도 보도된 것이지만 며칠 후 마산에서 김주열군의 주검이 발견됨으로써 4월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주장에 묻혀 그 동안 일반에게는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특히 경찰의 총검에 피투성이가 됐던 상황이며 임신부가 구타당해 절명한 상황 등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마찬가지로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은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세력이 선거로는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연행 구금한 다음 체육관선거를 통해 집권하려 하자, 민주일정에 따른 민주정부수립을 요구하며 계엄군에 대항해 맨몸으로 일어선 항쟁이다.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적인 시위마저 총칼로 진압하자 마침내 시민들이 무장봉기한 항쟁이다.

5·18광주민중항쟁은 전국적 확산이 불가능 한 채 광주만의 고립무원의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열흘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국가유공자로서 예우 받기는커녕 수구세력과 자유군인연합 등에 의해 “5·18은 북한군 특수부대원 600여명이 침투하여 저지른 사건”이라며 5·18단체 사무실까지 찾아와 백주테러도 서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1987년 5월 18일 ‘옛 망월묘역’에서는 5.18 광주 민주항쟁 7주기 기념식이 열렸고, 공식 식순이 끝나는 결의문 낭독의 시간에 카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최성호 회장이 ‘민주헌법쟁취 전남도민운동본부’ 발족선언문을 낭독하고, 기념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과 결의 내용을 제창하면서 본격적인 6월 항쟁의 시위를 당겼다.

19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전국적인 저항이 예견되면서 전두환 대통령은 4·13호헌 선언을 통해 1980년 5월처럼 체육관선거를 통해 장기집권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전국적인 군부독재타도의 함성이 거리를 뒤흔들게 된 것이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전국본부가 1987년 5월 27일에야 광화문 성공회 성당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확성기를 명동으로 향한 채 발족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 ‘민주헌법쟁취 전남도민운동본부’가 전국단위보다 10일 먼저 발족한 것을 보면, 당시 광주지역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민주화에 대한 열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물론 임진왜란과 구한말 의병운동을 포함하여 근현대사의 큰 물줄기를 이루고 있는 4·19, 5·18, 6월 항쟁이 모두 광주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광주는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긍지를 가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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