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새정치로 일어서야 한다
호남, 새정치로 일어서야 한다
  • 정진욱 새정치경제아카데미 원장
  • 승인 2013.02.2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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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욱 새정치경제아카데미 원장
지금, 한국정치에 대해 무언가 쓰는 것과 침묵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침묵을 선택할 것이다.

민주당은 구태의연한 공천으로 총선때 민심의 버림을 받더니 결국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떤 의미있는 반성이나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새누리당은 박근혜정부를 독재와 불통으로 상징되는 관료적 권위주의 국가로 갈 채비를 마쳤다. 그들에게 국민이란 구경꾼일 뿐이다.

야유밖에 못하는 힘없는 구경꾼. 그래도 정치인들 중 누군가가 2014년 또는 2016년에 지방선거와 총선에 나오면 또 국민은 그들 중 누군가를 의원과 자치단체장으로 뽑아줄 것이다.

그러니 쓸모없는 정치칼럼을 쓰는 대신 침묵하는 것이 좋으리라. 그나마 침묵은 시간이 지나면 허튼 발언보다 더 큰 천둥소리를 울리며 세상을 흔들고 세계를 바꾸어 놓지 않던가.

1863년 11월19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링컨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 전 부통령 후보였던 에드워드 에버레트가 2시간짜리 연설을 했다. 그는 당대의 연설가였다. 그 뒤를 이어 링컨이 한 연설은 300단어가 채 안 되는 2~3분짜리였다. 그 2~3분은 2시간에 비하면 침묵이나 마찬가지였다. 게티즈버그 연설의 그 유명한 마무리는 이렇다. “우리들에게 남은 일은...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굳이 한국 정치에 대해 무언가 말해야 한다면, 링컨의 이 침묵에 가까운 짧은 구절에서 시작해야 한다.

새정치, ‘국민에 의한’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정부는 ‘국민을 위한’ 그리고 ‘국민의’ 정부였다. 국민을 위한 정부는 역사상 모든 통치자가 부르짖는 것이다. 아주 이따금만 그것은 진실이다. ‘국민의’는 국민이 직접 정치를 하지 않고 국민의 대표자를 뽑아서 국회로 보내는 대의정치를 말한다. 근대이후 민주주의란 대의민주주의일만큼 그것은 최신, 최선의 정치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느덧 국민의 대표들이 국민을 배반하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다. 이제 정치인은 국민 이익의 수호자가 아니라 기득권의 수호자로 전락하고 있다. 국회의원의 지상 과제는 다음번 선거에서 다시 뽑히는 것, 즉 국회의원 자신의 이익 수호이다. 그것은 대의정치의 유효기간이 끝났다는 말과 같다. 링컨이 말한 ‘국민을 위한’ 그리고 ‘국민의’ 정부는 아쉽게도 사라졌다. 이제 남은 가능성은 ‘국민에 의한’ 정부뿐이다.

우리 정치의 새로운 변화도 ‘국민에 의한’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을 ‘새정치’라 불러보자. 새정치는 첫째, 국민이 투표자가 아니라 ‘정치활동가’로서 전면에 나서는 정치이다. 둘째, 새정치는 국민에게 권력을 주는 정치이다. 국가는 국민에게, 정당이라면 당원에게 권력을 주어야 한다. 당이 공천권을 흔들며 정치인과 국민을 줄세우기 시키는 ‘극악한’ 폐습을 없애야 한다. 셋째, 특정세력중심의 정치적 기득권을 깨는 정치이다. 넷째, 새정치는 대기업중심의 경제적 독점과 영남지역패권주의를 혁파하는 정치이다. 다섯째, 새정치는 유연한 연대의 정치이다. 지역과 계층, 정파를 대표하는 정치세력들이 소모적 정책을 줄이고 국민의 이익을 중심으로 합종연횡하는 정치이다.

민주당 중앙당과 시도당의 공천권 행사는 죄악

민주당으로 좁혀서 본다면 국민에 의한 새정치는 당원과 국민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중앙당의 당직을 축소하고 정책연구 기능중심의 정당으로 바뀌어야 한다. ‘중앙당’이란 자세히 뜯어보면 계파 보스의 기득권 연합체라는 말과 동의어다. 지역과 지구당, 당원에 권한을 대폭 이양해야 한다. 그 핵심은 공천권의 포기다. 공천을 위해 정치인들은 모두 신념과 정책을 버리고 정파보스의 난쟁이로 전락한다.

민주당에서 인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천 심사위는 최소한의 자격만 심사하고 출마를 원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경쟁하게 해야 한다. 특히 민주당 간판만 달면 당선된다는 호남 지역에서는 중앙당과 시도당이 공천권을 행사하는 것은 죄악이다. 사실 민주당 혁신의 핵심은 이것이다. 스스로 가진 권력을 국민에게 넘길 때만 민주당에게 국민은 눈길을 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는 민주당은 구체적 개혁방안의 제시없이 친노주류냐, 비주류냐의 대결이다. 이대로가면 국민이든 당원이든 쳐다보지도 않는 전당대회가 될 것이다. 지방선거에서도 역시 이기기 어렵다.

최근 논의되는 ‘안철수 신당’은 어떤가. 안철수 선생이 돌아온다고 바로 당을 만들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럴 정치적 에너지의 축적도 없다. 측근 인사들이 재보궐 선거에도 나가고, 재단같은 단체도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분분한데, 순서가 잘못 됐다. 그들이 벤치마킹한다는 김대중 대통령은 안철수 선생과 경우가 다르다. DJ의 선거패배는 숫자의 패배이지 후보나 캠프, 조직의 패배가 아니었다.

그러나 안철수 후보는 후보자신, 캠프, 지역조직이 모두 경험부족, 역부족이었다. 그것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바닥에서 시작해야 한다. 여전히 꽃가마를 타는 방식을 못 버린다면 사태 파악이 안 된 것이다. 안 선생의 측근이 보궐 선거에 나선다면, 어떤 정책과 경륜으로 나서려는지, 지난 선거의 실패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책임은 보여주었는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안 선생이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과 진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광주전남, 호남으로 눈을 돌려보자. 호남에서는 고민이 깊은 만큼 질문을 잘 던져야 좋은 답을 얻을 수 있다.

민주당인가 아닌가? 안철수인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민주당이냐고 먼저 묻고 민주당이니 봐주자는 방식이 그동안 모든 민주당의 악습과 구악을 온존하게 만든 주범이다. 어떤 민주당인가, 즉 새정치인가 아닌가를 물어야 한다. 끝내 아니라면 확 바꾸든지 버리든지 선택을 결단해야 한다.

안철수인가 아닌가 또한 어리석은 질문이다. 실패로부터 철저히 배웠는가, 바닥에서 시작하는가, 비전뿐만 아니라 방식에서도 진정한 새정치인가를 엄밀하게 묻고 따져야 한다. 전혀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버려야 한다.

호남에서 한국정치의 새로운 꿈을 꾸자

기존의 정치에서 답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호남에서 한국 정치의 새로운 꿈을 꾸는 수밖에 없다. 호남에서 새로운 정치를 실현시킬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 언제까지 대선 후보들에 줄을 서고 전략적 투표라며 92%의 몰표를 줄 것인가.

지난번 대선때 주요 야권 후보 진영 어디에도 호남 출신으로서 호남의 전략적 이익을 관철시키고 호남 인재의 균형있는 활용을 책임질만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것이 호남 정치, 호남 정치인의 현주소다. 지금 호남이 겪고 있는 정치적 고통은 지난 25년동안 민주당이 장기집권을 하면서도 호남에서 어떤 민주정치의 모범도 만들어내지 못한 죄닦음인지도 모른다. 새정치를 감당하여 대선후보가 될 만한 인물들을 키워내지 못한 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늦지 않았다. 훌륭한 새인물과 새정치세력을 키워내야 한다. 그 세력이 어떤 대권 후보가 나오든 연대의 주체가 되어 호남의 문제, 한국 정치의 미래를 풀어내야 한다. 92%의 전략적 투표를 할 정도의 정치력이라면 새정치 세력을 키워내는 정도는 일도 아니다.

과연 호남은 그런 자각과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한국정치의 미래, 호남의 앞날이 걸려있다. 나는 지금 호남의 거대한 침묵이 그 같은 정치력을 발휘하기 위한 정중동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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