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여성운동사26>광주의 ‘테레사 수녀’ 서서평 선교사(1)
<광주전남여성운동사26>광주의 ‘테레사 수녀’ 서서평 선교사(1)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3.01.16 1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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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온 여성운동가들의 ‘대모’

광주 남구 양림동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터다. 바로 이곳에는 근현대의 광주·전남을 이끌었던 여성운동가들이 역동적인 활동을 했던 곳이기도 하며, 곳곳에는 그 흔적들을 엿볼 수가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광주의 근대정신과 희생, 공동체 운동들이 꿈틀됐던 곳이기도 하다. 버들나무가 많아 양림동이라고 불려왔던 것과 달리 1900년대 초 척박하기만 했던 이곳에서 어떤 일들이 펼쳐진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이 땅을 밟은 파란 눈의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전남의 나약했던 여성과 나병환자를 보살피며, 수많은 여성운동가들에게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어머니 없이 자라 강인한 정신력

▲서서평 선교사 본명 엘리제 요한나 쉐핑(Elise Johanna Shepping)
그녀에게 영향을 받은 여성들은 유화례, 조아라, 김필례 등으로 훗날 여성권익향상을 위해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나섰던 이들이었다.

1912년 우리나라 선교사로 온 서서평은 22년간 고아와 과부들의 친구들로 살아가며 이름이 없는 여인들에게는 이름을 지어주고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 땅에 큰 업적을 남기고 떠난 그녀는 1880년 9월 26일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배경의 가정에서 자란 그녀의 본명은 ‘엘리제 요한나 쉐핑(Elise Johanna Shepping)’이였다. 광주에 와서 한국의 풍습을 익히면서 한국식 이름 ‘서서평’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태어난 직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혼자 극복하기 힘든 상처를 안고서 자라왔다. 서평의 어머니는 남편과 사별한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서평을 할머니에게 맡긴 채 떠나게 됐다. 이후 홀로 독일에 남겨진 서평은 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라났다.

한편 할머니는 서평에게 가난한 형편에도 가톨릭 교육을 주입시켜줬다. 할머니 손에 어렵게 자라온 서평은 초라한 행색으로 친구들로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훗날 서평이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온 탓에 강인한 정신력을 갖고 희생정신을 보여줬던 것에 보탬이 된듯하다.

하지만 서평이 9살이 되던 해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그녀는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어머니를 미국에서 만난 서서평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고서 1899년 가톨릭 배경의 미션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게 됐다.

개신교로 개종, 그리고 어머니와 절연

그 과정 속에서 간호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녀는 성마가병원 간호전문학교 (St. Marks Hospital Nursing School)에 진학하고 1901년 졸업하게 됐다. 하지만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을 한 서평이 힘든 일을 하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어머니는 섭섭함은 커져갔다. 결국 그녀의 어머니는 “다시는 너를 보고 싶지 않다. 너를 딸로 여기지 않겠다”는 절연선언까지 하게 된다.

그래서 인지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던 서평이 훗날에 고아들과 미망인들에게 관심을 쏟았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간호 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실을 듣고 조선 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게 된다. 여러 명의 지원자들이 있었지만 당당히 합격했던 서평은 1912년 한국으로 오게 되고 이때 어머니와도 이별을 하게 됐다.

그녀가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은 1912년 3월 중순. 그녀 나의 32세로 미혼여성의 몸으로 전라도 목포를 거쳐 광주를 찾아와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한 줄기의 ‘빛’이 되어줬다.

이곳에 오자마자 광주 제중원(현 기독병원) 간호사로 근무하기 시작한 서평은 제일 먼저 한국어 학습을 이어나갔다.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익히는 일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진정한 한국인이 되기 위해서 서평은 고무신과 한복을 즐겨 입고 보리밥에 된장국을 좋아했다.

▲1920년대 광주 제중원

선교사 서서평의 ‘한국사랑’

외국인에게는 냄새나는 낯선 된장국이 꺼려질 법도 한데 이를 피하지 않았던 서평은 외모 이외에 옷차림, 말투, 행동이 모두 한국인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검은 통치마를 입고 맞는 신발이 없어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던 그녀는 한국어를 하면서 고아를 등에 업고 다니며 광주 사람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에게 남다른 애정을 지녔던 서평은 광주에서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이일학교와 여성운동의 산실인 부인조력회, 조선여성절제회, 조선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 전신), 여전도회연합회 등을 창설해 여성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서서평의 당시 일기엔 “한 달간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이 굶주리고 있거나 병이 들어 앓고 있고,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고 기록해 참혹했던 당시 시대상황을 알 수 있었다.

한편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어멈’등으로 불리는 이름조차 없는 조선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며,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자존감을 살리도록 했다.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여성들에게 간호사라는 직업을 갖게 하도록 세브란스 간호사 훈련학교에 합류하면서 이를 더욱 구체화시켰다. 그리하여 1917년 세브란스에 파견된 서평은 병원 근무 이외에 간호사를 양성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고 독립운동으로 부상당한 이들을 돌보면서 오방 최흥종 목사 등 독립 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도맡아서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기미독립운동에 관여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더 이상 서울에 거주할 수 없게 되어 광주로 다시 내려오게 된다./김다이 기자

▲일제 강점기 시절 광주, 전남에 나병(한센병) 환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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