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처럼 믿을 수 있는 사회
119처럼 믿을 수 있는 사회
  • 문틈 시인
  • 승인 2012.11.16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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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의 화두는 신뢰다. 얼마 전 화재진압에 나섰다가 사망한 어느 소방관의 죽음을 보고 우리 사회의 신뢰를 한참 생각해보았다. 그의 의로운 죽음을 놓고 자기 직무에 충실했다는 말로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그의 고귀한 죽음은 헝클어진 우리 사회의 구원자로서 대단한 상징성을 갖는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증표로서 그의 죽음을 오래 깊이 기리고 싶다.
사실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신뢰란 약에 쓰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다. 종교, 언론, 교육, 금융… 할 것 없이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인프라를 과연 믿을 수 있는지 자문해본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생명의 양식인 먹을거리. 솔직히 나는 식자재뿐만 아니라 식당 음식의 조리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 위생처리에서부터 화학조미료 투입 등 어느 것 한 가지도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식당에 가는 것을 극력 피한다. 농약과 조미료와 불결이 위장을 쥐어뜯는 것 같아서다.

줄서기 하는 교육도 외식 못지않게 믿지 못한다. 한 시민으로서의 자질양성, 한 인간으로서의 전인적 교양의 바탕을 마련해주는 교육은 온데간데 없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온통 대학입학 줄서기 교육이다.

차라리 옛날 동몽선습을 가르치던 서당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조차 든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어깨동무 교육이 아니라 남의 윗자리에 올라가는 계급 만들기 교육은 심하게 말하면 서로 물어뜯는 이리떼를 양성하는 교육이다.

종교는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에서 영혼을 구제하는 역할을 맡아주어야 옳거늘 개인의 발복을 비는 기복신앙으로 떨어져 우리 사회를 정화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밤하늘에 빨간 십자가 네온사인은 점점 더 높이 올라가 숲을 이루고 있지만 이미 그것은 구원의 아침을 데려오지 못한다. 밤에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관청 같은 기관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의 구조가 남을 신뢰하는 사회가 아니라 남의 등을 치고 살아가는 사회가 아닌가 싶어 때로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다. 흰개미떼에 속이 다 파먹힌 바오밥나무가 겉으로 보면 푸른 잎사귀가 무성한 건강한 나무처럼 보여도 어느 날 힘없이 스러지고 말듯이 우리 사회가 그 꼴이 날까 싶어 두려운 것이다.

그래도 아침에 깨어 일어나 보면 세상은 끄떡없이 잘 굴러간다. 누르는 곳마다 고름이 나오는 우리 사회의 몸통 어딘가에서 우리 사회를 풀무질하는 사람들이 있어 날마다 이렇게 무사하게 굴러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강아지가 광에 갇혀 못나온다고 해도 쫓아와 구해주는 119 같은 데가 있어서일 것이라고 말이다.

대선 후보들이 마치 산타클로스라도 된 듯 경쟁적으로 반값 등록금, 정년 연장, 의료혜택, 무상 복지 등 말만 들어도 배부른 공약들을 날마다 쏟아내고 있다. 나는 그것을 식당이나 교육처럼 믿지 못한다.
그런 사람 호리는 허풍 공약들 말고 먼저 우리 사회가 신뢰하는 사회가 되도록 하는 공약을 내놓았으면 한다. 믿음이 강물처럼 넘치는 사회가 온다면 하루 한 끼만 먹고 살아도 좋을 것 같다. 나이 쉰에 결혼하여 2년도 채 못된, 불을 끄다가 죽어간 그 119 소방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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