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소리
가을이 오는 소리
  • 문틈 시인
  • 승인 2012.09.13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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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쨍 내려쬐는 뙤약볕과 귀청을 볶아대는 매미소리. 그 여름이 어느덧 가고 이 나라에 가을이 오고 있다. 나는 벌써 전부터 가을을 예감하고 있었다. 녹음해 온 소리를 모조리 다 내뱉은 매미들이 죽어서 빈 통처럼 길바닥 여기저기 나뒹굴고, 여치, 귀뚜라미 들이 밤을 도와 귓가에서 우는 것을 들으며 가을이구나, 하고 조금은 쓸쓸한 기분을 얼마 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새 이렇게 천리는 어김없이 운행되고 있다니 대저 이 얼마나 엄숙한 일인가, 이 나라에 가을이 온다는 것까지도.

가만 들어보니 풀벌레들이 울어쌓는 것은 예전부터 전해오는 그들의 고전을 읽는 것 같기도 하다. 보통 우리가 ‘운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일방적인 해석이다. 풀벌레들은 필시 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옛날 아이들이 서당에서 동몽선습을 소리 내어 읽듯이 그렇게 그들의 고전을 암송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면 풀벌레들의 오랜 내력을 알 수도 있으련만 인간과 풀벌레는 아파트 이웃집처럼 너무나 가깝고도 멀리에 있는 것 같다. 풀벌레 소리를 더 자세히 들어보면 제각기 다른 소리들이다. 어느 놈도 같은 소리를 내는 놈이 없다. 찌르르, 쪼르르, 쓰으쓰으, 씨이씨이, 또르르또르르....하기사 인간들도 휴대폰에 대고 서로 다른 소리들을 나발대고 있으니 수많은 풀벌레들이 다 똑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긴 하다.

이제부터 달빛의 화소가 한결 선명한 계절이 시작된다. 글쎄 어젯밤에는 지인들을 만나 1차, 2차, 3차, 4차, 5차까지 술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자정 무렵에야 귀가했는데 오는 길에 느낌이 하 이상해 하늘을 쳐다보았더니 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확실히 여름밤의 달과는 판연히 달랐다. 한결 서늘한 몸매라고 할까,

나는 집에 가는 것도 잊고 멈춰서서 한참 달의 행로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달을 보기가 선한 이미 가을인 것이다. 그런데 풀벌레들도 나처럼 달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감수성이 예민한 풀벌레들의 소리와 나의 달바라기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도 모른다.

가을밤이라고 해서 이 나라에 풀벌레 소리만이 들리는 것은 아니다. 나뭇잎새들이 서걱거리는 소리, 대숲이 수런대는 소리, 뒷산에 산과일이 떨어지는 소리, 멀리서 바다로 가는 강물 흐르는 소리, 이런저런 소리들이 들린다.

그 소리들이 제각각 다른 음색으로 배겟머리 내 귓가에 날아온다. 그런 가을이 오는 소리들을 듣느라 나는 그만 새벽이 다 되어서야 가까스로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밤부터는 홑이불을 개고 조금 두꺼운 이불을 덮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희미한 기억이 난다.

가을에는 부도난 사람까지도 시인의 마음이 된다, 라고 나는 믿는다. 여름 내내 신작로가로 열지어 행진하는 보무당당한 군대 모습 같던 가로수들도 걸음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과수원에서는 과실들이 자신의 몸뚱아리에 잘 익은 색깔을 칠해 등불처럼 가지에 내걸 것이다.

어떤 시인은 가을에는 모든 것이 낙하한다고 노래했는데 나는 모든 것이 내 품으로 안겨드는 것만 같다. 만물의 오랜 기다림과 오랜 그리움이 합쳐서 마침내 그 결말을 짓는 것을 보라. 그것들이 바로 가을의 소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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