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매미 그리고 구름
청포도, 매미 그리고 구름
  • 문틈 시인
  • 승인 2012.07.1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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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몹시도 여름이 그리웠다. 지난 겨울 외투깃을 올리고 발을 동동거리며 여름을 기다렸다. 날마다 청포도와 매미와 구름을 생각했다. 겨울 속에서 그리는 여름날은 먼 나라에서 온 그림엽서처럼 아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사는 세상에 그 여름이 왔다.

모든 초록 나뭇잎새들이 태양의 입맞춤에 입술을 대고, 나무숲은 벌판을 달려온 바람에 몸을 내맡긴다. 나무들은 한껏 치장한 차림으로 그렇게 여름 앞으로 걸어나오고, 나도 웅크렸던 내 마음을 펴 초록으로 감싸고 어디든 홀로 가리라 행장을 꾸린다.

거기 청포도가 있는 상리과원으로 가고 싶었다. 가서 나도 과원의 한 그루 과목이 되어 거기 서있고 싶었다. 가지가 휘어지도록 실과들이 매달려 있는 나무들의 엄청난 사태는 경이롭다. 투명에 가까운 청포도 송이들이 여름의 내부처럼 포도나무마다에 기적을 내보였다. 여름이라는 말 그대로 온갖 과일들이 열려서 여름을 증언한다. 여름이 위대하다는 시인의 말은 결코 허사가 아니다.

마을 어귀의 포플러 나무에서는 매미들이 한사코 무어라 큰 소리로 길게 외쳐댄다. 아마도 마을에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것이리라. 아니면 지난 해 그들의 부모 매미로부터 전해온 여름의 경전을 다른 매미들에게 구전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긴 평생을 지하에서 공부만 하고 나온 매미들이니 여름 경전쯤은 다들 외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 마을을 지켜온 이장도 매미 소리를 알아듣지는 못한다. 매미는 여름하고만 교감할 뿐이다.

뭐니 해도 여름은 구름의 계절이다. 하늘 어딘가에 있을 구름공장에서 마구 뿜어내는 하얀 구름조각들이 하늘을 마당삼아 이리저리 헤매 다닌다. 구름은 단순히 땅의 것들이 하늘로 갔다가 하늘에서 다시 땅으로 순환하는 그런 자연의 진실을 넘어선다.

내가 본 바로는 땅과 하늘의 경계에 떠있는 환상 같은 것이다. 있는 것 같지만 없고 없는 것 같지만 있는 그런 존재. 구름을 알아본 옛사람들은 그래서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의 일어남과 같고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의 사라짐‘과 같다고 생을 구름에 비유했는지도 모른다.

보리타작 마당에 쌓아놓은 보릿대 무더기에 드러누워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또 얼마나 눈물지으며 행복해했는지 모른다. 여름이 먼 나라의 엽서에서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구름이 무시로 현현하는 모양들을 보면 그것이 마치 매미가 암송하는 경전이 저것이 아닌가 싶으다.

일찍이 시인 괴테는 산봉우리에 머문 구름을 보고 ’먼 산봉우리마다에 휴식이 있어라”고 정신의 높이를 노래했다. 워즈워드도 “나는 한 조각 구름처럼 외로이 방황했노라”라고 멀리 가는 자의 외로운 영혼을 그렸다. 그들도 어깨 너머로 매미가 외우는 여름경전을 읽어본 것이리라.

나는 구름을 따라 어딘가로 가고 싶었다. 죽는 날까지 그러리라 다짐하며. 구름이 가는 곳을 따라가다 몇 번이고 길바닥에 넘어지면서도 일어섰다. 그런데 구름은 아까 본 것이 사라지고 지금 본 것이 사라지고 이따가 보는 것도 금방 사라져버리고 만다. 어느 한 순간도 구름은 그대로 있지 않다. 그렇게 위대한 여름마저도 사라져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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