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설거지하는 남자
집에서 설거지하는 남자
  • 문틈 시인
  • 승인 2012.07.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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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설거지하는 남자다. 부엌 개숫대에 가족들이 식사를 마친 그릇들을 갖다 놓으면 그것들을 깨끗이 닦아놓는다. 밥그릇, 국그릇, 반찬그릇, 접시, 수저 들을 깨끗이 닦아서 제 자리에 놓는 일인데 그냥 할 만하다.

식구라야 세 명뿐이므로 내가 하는 설거지를 일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 설거지는 아내가 하는 것으로 평생 여기고 살아왔는데 언젠가부터 내가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시작하다 보니 스스럼없이 되었다.

아내의 부탁으로 하게 된 것도 아니다. 어느 날 아내가 바깥일을 보러 간 사이에 개숫대에 수북이 쌓인 그릇들을 보고 내가 좀 미리 치워 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말끔히 닦아 놓았더니 피곤한 몸으로 귀가한 아내가 “설거지 당신이 했어요?”하고 기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난 모르겠는데...” 짐짓 모른 체했더니 “그렇잖아도 설거지할 일이 신경 쓰였는데 고마워요.” 하며 너무나 반겼다. 그후로 아내의 고마워하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가끔 하다 보니 이제 설거지 전문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설거지를 할 때 나는 일체 세제를 쓰지 않는다. 기름기가 있는 그릇은 세제를 써야 깨끗이 된다고 아내가 누누이 일러주지만 나는 세제 기운이 그릇에 남을까 싶고, 또 세제로 오염된 물이 결국 하수구를 통해 강이나 바다로 간다는 생각 때문에 절대 사절이다.

설거지도 자주 하다 보니 요령이라기보다는 재미가 생긴다. 집중해서 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흐르는 물로 헹구고 행주로 닦아내고 그릇 어디에 무엇이 혹시 묻었는지 눈길로 살피고, 보송보송해진 그릇들을 제 자리에 갖다 놓는 과정이 살짝 재미가 있다는 말이다.

별 놈의 재미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속내는 앞서 말한 대로 집중이라는 데에 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예를 들면 창유리를 닦아도 정성들여 집중해서 그 일을 하면 몰입 상태가 되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그 동안은 세상 잡일을 잊어버리는 경지에 이른다. 그래서 나는 설거지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설거지가 대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자주 바깥일을 보고 오는 아내한테는 그런 잔손이 가는 것이라도 미리 해놓으면 기분이 썩 좋은가 보다. 마루 청소를 해놓는다든지, 목요일마다 재활용 쓰레기를 내놓고 분류를 한다든지, 아내를 기쁘게 할 일을 찾아보면 꽤나 여러 가지가 된다.

그러니까 내가 공식적으로 아내를 즐겁게 해줄 일들이 집안엔 여러 가지가 있다. 이것은 사실 별로 생색이 안나는 집안 일들이지만 아내가 기뻐한다면야. 하다 보니 아내가 기뻐하는 것이 도리어 내가 기쁘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부 사이에서 기쁨이란 확실히 전염되는 것인가싶다.

살펴보면 아내 말고 어머니에게도 기쁘게 해드릴 일이 있다. 예를 들면 나는 불효 전문가이기도 한데 일년 삼백육십오일 거르지 않고 날마다 늙으신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일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제 귀가 어두워지셔서 전화기에 대고 큰 소리로 말해야 하므로 가족들이 다 듣게 되는 것이 좀 그렇지만 어머니가 반가워하시니 어이 못할 손가.

가족들이 기뻐하는 이런 사소한 일들이 집집마다 많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눈에 뜨이지도 않고, 남한테 말하기도 멋쩍은 자잘한 일들이지만, 그런 일들을 하다보면 시멘트 집이 스위트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한데 설거지하는 입장에서 볼 때 그릇들이 미국처럼 모두 접시로 되어 있다면 훨씬 좋을 듯한데 그렇다고 뭐 그것이 큰 불만거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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