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버리지 못하는 병
책을 버리지 못하는 병
  • 문틈/시인
  • 승인 2012.07.02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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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마음 먹고 집에 있는 책들을 버리기로 했다. 집 사람이 어디 시골 학교 같은데 기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몇 년 전부터 계속 보채는 데다 작은 집으로 가서 단출하게 살려면 책을 줄여야겠기에 마침내 버리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매일 책장에서 버릴 책들을 골라내고 있는데 이제사 겨우 다섯 박스 분량을 처리했을 뿐이다. 아내는 성경 책 한권만 남겨두고 방 3개의 책장에 가득한 책들을 모조리 다 버리자고 하는데 아직 거기까지는 내 결심이 가지 못했다.

집에는 책이 5,6천 권쯤 있다. 오랜 동안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해온 애장서들이다. 아니 그것들을 가지고 서생으로 이 생전 먹고 살아왔는데, 이즈음엔 책들을 천덕꾸러기 신세로 대접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조차 하다. 오래되어 퀴퀴한 책들 냄새가 코를 찌른다. 게다가 이제는 책들이 별로 소용이 닿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두어 달 전 논어를 꺼내 읽고 새삼 내 인생을 반성하기도 하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젊은 날의 고뇌를 되살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저 많은 책들은 이제는 아무리 애장서라고 해도 더 이상 나에게 절실한 필요를 주지 못한다. 그만큼 나도 나이가 든 것이다. 다시 읽을 것도 아니고 놓아두어봤자 별로 소용이 있을 것도 아니다. 그것이 엄숙한 현실이다.

버릴 책들을 한 권 한 권 골라내는데 그 책마다에 얽힌 인연, 사연들이 갖가지 추억을 불러낸다.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친필 사인을 해서 보내준 책이고, 이 책은 옛 친구가 보내준 책이고, 또 저 책은 내 청춘을 위로해준 책이고, 저 책은 돈이 모자란 10대 시절 문화서점 여점원이 값을 깎아준 책이고...추억에 잠기다 보니 버릴 책을 쉽게 추려낼 수가 없다. 그래서 박스에 던져 넣었다간 다시 꺼내들기 일쑤다. 추억을 던져버리기가 어디 그렇게 쉬울까보냐.

그렇다고 내가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은 것도 아니다. 읽고 싶어서 구해놓았다가 못 읽은 책들도 꽤 있다. 어떤 책들은 세월에 견디지 못해 종이가 누렇게 바랜 데다 책장이 너덜너덜해져 책장이 떨어져 나오거나 저절로 바스라지기도 한다.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앙상하게 늙어버린 책들이다. 어떤 책 속에는 사진이나 엽서, 메모장, 심지어는 옛날 지폐가 끼여 있기도 한다.

책장의 책들은 그야말로 나의 또다른 역사를 증언하는 것만 같다. 내가 살아온 정신적 방황 같은 것이라고 할까. 가만 생각해보니 누구에게도 빌려주는 것조차 꺼려했던 나의 동지 같은 책들을 버린다는 것이 슬프기조차 하다. 내가 좋아하는 조선의 허균은 자기 집을 팔아 중국에서 책을 몇 수레나 사왔다는데 말이다.

책을 숭배해온 지난 날들, 책이 돈보다 훨씬 가치가 있었던 관념들, 나의 인생길이 책 속에 있다고 굳게 믿었던 순수한 날들이 책을 버리려 드니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워진다. 하지만 나는 이제 책들을 버려야만 한다. 단순히 이사갈 때 짐이 되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책을 읽고 무엇이 무엇인지 더더욱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린 이유도 조금은 있다.

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얻는다는 말도 있듯이 내가 책을 버리고 얻게 될 것이 무엇인지 기다리는 마음도 있고. 하지만 책을 다 버리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불면의 밤을 수놓은 추억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아서다. 책이란 어쩌면 그 자체가 하나의 병인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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