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다에 동백꽃들이 지는 날
봄바다에 동백꽃들이 지는 날
  • 문틈/시인
  • 승인 2012.04.1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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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눈녹이 바람이 불어오는 날 완도군 군외면 바닷가에 간다. 바다가 있던 자리에는 시야 끝까지 갯벌이 천야만야 퍼져 있다. 푸른 바다는 수평선 너머로 가버리고, 오후의 바닷가 갯벌 위에는 새빨간 동백꽃들만 시나브로 속절없이 떨어진다.

해풍에 참수당한 아랍국의 이교도들처럼 시뻘건 동백꽃들은 목이 댕겅 댕겅 베어져 바닥에 떨어져 있다. 그 빨간 동백꽃송이들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울며불며 사는 이 인생이란 것이 대체 무엇일까, 하고.

이런 대책 없는 질문을 하다 말다 하고 있노라면 어느 새 동백나무 잎새에서 눈부시게 빛나던 석양은 기울어가고, 바다는 육지쪽에서 무슨 수신호라도 받은 듯 수평선 너머에서 일제히 바닷가쪽으로 내달려오기 시작한다. 몽고군의 기병대처럼 바닷가를 향하여 우루루 우루루 질주해온다. 그러나 바다의 크고 작은 파도들이 칼이나 화살을 들고 달려오는 것 같지는 않다.

바다는 이윽고 완도군 군외면 바닷가에까지 몰려와서 마침내는 학생수가 올해 열여덟 명밖에 안되는 초등학교 분교 운동장을 넘겨보다가는 올라갈까 말까 머뭇거린다. 그 푸른 바다 물결 위에는 갯벌에 낭자한 빨간 동백꽃송이들이 둥 둥 떠 있다.

흡사 푸른 파도에 리본을 달기라도 한 것처럼 파도들은 동백꽃들을 띄우고 있다. 아, 푸른 바다에 빨간 동백꽃들이 물결따라 멀리 멀리 떠가는 모양이라니. 그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무엇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사람이란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어쨌든 울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본디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더 잃을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사랑이라고 한들, 혹은 허튼 명예 같은 것이라 한들 아무것도 그것들은 내 것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그럴 것이다. 눈 속에서 피던 동백꽃, 해풍에 찬 울음을 감추며 피던 동백꽃, 그 동백꽃송이들을 데불고 가는 바다풍경이 그렇게 답을 말해주는 듯하다.

사실 파도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파도 하나하나는 무어라 이름 붙이기도 전에 스러진다. 파도는 생겼다가는 스러지고 또 생긴다. 무수한 파도는 바다의 지극히 작은 경험체들인 것이다. 나는 푸른 바다에 떠가는 동백꽃송이들이 정작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파도들은 결국 바다로 돌아간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니다. 모든 파도들은 본디 바다의 일부인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세상에서 내 것을 추구하고, 욕망하고, 소유하려 애썼다. 나는 단지 하나의 파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진정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우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동백꽃송이가 바다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세계의 종말을 본 것처럼 젊은 날 그렇게 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울지 않는다. 봄바다에 동백꽃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아무도 울어서는 안된다. 봄바다에서 내가 본 것은 내가 한 조각 파도라는 것, 그 파도가 아름다운 동백꽃송이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것 말고 세상에서 더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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