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두얼굴(야누스)
자유주의의 두얼굴(야누스)
  • 이홍길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상임대표
  • 승인 2011.12.26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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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두얼굴) 숭배는 로마시가 이루어지기 전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로마군대가 출정할 때는 야누스가 조각된 의례용 출입구를 통과하는데, 그 행진의 방식에 따라 행운과 불운이 갈린다는 특별한 믿음이 결부되어 있었다. 양날의 면도는 분명 문명의 이기임에도 그 사용이 조심스럽다. 한쪽을 사용하다가 다른 쪽의 날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상사는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인민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등 여러 사상들의 역동적 전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교호를 통한 변증적 지양보다는 갈등 대립의 심화로 남북갈등에서 남남갈등의 조짐까지도 보이고 있다.

그냥의 일상을 영위하는 시민들은 이미 주어진 자유주의적 조건 속에서 오늘을 살고 있지만, 이해관계 집단과 그 나팔수들은 미래지향의 좌표 점을 달리 찍느라 이전투구도 불사하는양 싶다. 국체가 민주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인가 그냥 민주주의인가하고 불필요한 논란들을 부풀려 가고 있다. 민주공화국은 두말할 것 없이 자유민주일 것인데도 구태여 자유를 곁들여야 직성이 풀릴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도 궁금하고 이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정치 환경 역시 예사롭지 않다.

이러한 논란 속에 생뚱맞게도 “8000천만 중국공산당과 만날 때 한국인들이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자유’가 정작 한국사회의 일각에서 홀대 받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는 개탄마저 나오고 있다. 진정 홀대받고 있을까? 공기와 물의 고마움을 들어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들이 그것들을 홀대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의 기우가 전혀 가공의 것만은 아니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봉건적 신분질서와 절대 권력에 대한 저항이념으로 등장하였다.

그 역사적 맥락을 부르조아 계급이념으로 한정하여 착취집단인 부르조아의 이념으로 극복대상으로 삼으면서 인민을 무산계급적으로 인식하는 세력이 등장하여 자유주의를 민주주의에서 배제하였다. 그리하여 공산주의나 인민민주주의를 선진화 정당화시켰다. 인간행복의 절대조건인 자유는 역사발전의 최후단계인 계급없는 공산사회에다 그 실현을 유보하면서 .

그런데 인간생존은 유한하고 생존하는 가운데 행복을 추구하고 그 생존은 자유로워야 했다.
근래에 문지영은 자유주의가 특정한 시기 서구사회의 구체적인 역사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것으로 등장하여 역사의 진전과 함께 다양한 형태로 분화 발전한 점에 착안하여, 한국의 자유주의도 한국 특유의 역사적 맥락과 정치사회적 조건과 그것이 마주한 현실적 과제와 상관되어서 이루어져 왔음을 지적하였다.

그의 인식을 통하여 한국 자유주의의 양면성에 주목하게 된다. 해방된 신생 대한민국이 단독선거로 탄생되었을 때, 그 정당성은 북한이 공산국가로 부각되면서 자유 민주이념이 상대적으로 강조되었지만, 그 실질은 무시되거나 실종되었다. 민족상잔의 전쟁도, 이후의 안보논리나 공안정국들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리하여 국가권력 행사는 독재로 반공이 단연 자유 민주를 압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반독재투쟁으로 자유주의를 그 이념으로 삼아, 자유주의의 기본들을 부정하는 반공을 해소함으로써 자유주의의 정통을 회복코저 하였다.

한국자유주의의 양면성은 정통 지배이념으로서의 면모와 저항이념으로서의 면모가 다른 주체들 간의 정치투쟁의 양상으로 나타나면서도 자유의 가치는 부정되지 않았다. 그것이 민주화의 필수자양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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