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는 다리 9 창덕궁 홍예교, 벌교 도마교, 진천 농교
멀리 가는 다리 9 창덕궁 홍예교, 벌교 도마교, 진천 농교
  • 윤영숙 기자
  • 승인 2011.11.07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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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세 개의 다리
왕족이 건넜던 홍예다리엔 낙엽만 남아
부용산 아픈 기억을 간직해온 도마교
지네처럼 살아 천년을 다가온 농다리
 
다리는 모양도 여러 형태이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각각 다르다. 왕족이 이용하는 다리가 있는가 하면 마을 주민이나 농부가 이용하는 다리도 있다. 그리고 다리라고 불러도 될 성 싶은지 모를 정도의 짧은 다리와 잡석으로 만든 긴 다리가 있다.

창덕궁의 홍예교는 그 다리 길이가 너무 짧다. 아마 다리라고 한 것 중에서 가장 짧지 않나 싶을 정도다. 길이는 불과 2m 정도다. 그냥 폴짝 뛰면 건너갈 듯싶다. 벌교 도마교는 단단한 모습을 보인다. 한 때 벌교에서 광주로 가는 길은 여기 뿐이었다. 진천 농교는 잡석으로 만든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평가받는다. 오늘은 이 세 곳을 여행한다.

세계문화유산에 시멘트 포장도로

창덕궁 홍예교는 특별관람구역이다. 오후 4시30분 안에 창덕궁 내의 별도의 입구인 후원까지 도착해야 하고 개인별 입장이 아닌 여러 사람씩 모여 집합하여 입장할 수 있다.

이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온전한 보존을 위해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하루에 9회가 진행된다. 1회 관람객을 최대 1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조금 늦었더니 입장을 거절당했다.

하는 수 없이 창덕궁 관리소장까지 찾아가 취재차 사진만 찍을 것이니 협조를 부탁했다. 겨우 승낙을 받아 직원과 함께 찾아간 거리는 꽤 멀었다.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하지만 후원으로 가는 길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어 전통미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그곳은 창덕궁 비밀의 정원이었다. 이곳 가운데 일부는 일반관람객에게 개방되지 않는 곳도 있다.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은 반월지에 다리를 담그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정자로 인조 22년(1644)에 만들었다. 모양은 육각정자의 형태로 특이한 것은 겹지붕으로 되어 있다.

존덕정이 있는 연못의 물이 차서 넘치면 개천으로 흘러서 관람정 정자 앞 연못인 반도지로 흘러든다. 도랑에는 홍예를 튼 아름다운 돌다리가 있다. 아마도 왕족만 건너다녔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폴짝 뛰어넘을만한 창덕궁 홍예교

축조방법은 선단석을 2단 쌓고 그 위에 홍예석을 좌우 1개씩을 가공하여 정교하게 쌓았다. 다리 가운데는 인방석을 깔아 보다리 형식을 취했다.

이 돌다리를 건너기 전 양쪽에는 석함이 좌우에 하나씩 놓여있고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키가 높은 석물이 하나 있는데 이것을 해시계를 받치는 ‘일영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조선고적도보>10권에서는 이 위에 괴석을 담았던 석함을 받치는 대석이었다고 한다.

존덕정 홍예교는 수원 화홍문과 형식이 비슷하다. 다리는 개울과 약간의 사각을 갖게 놓였다. 홍예교 밑은 계류를 모아 넘쳐흐르게 하는 석지(石池)처럼 만들고 판석교 다리 밑에 장대판석으로 물막이를 했다. 그곳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서 물의 흐름과 속도를 조절하였다.

이 연못가의 존덕정은 후원의 그 어느 정자보다 화사하고 정교하다. 특히 눈여겨볼 만한 한 것은 존덕정 북쪽 창방(昌枋)의 게판(揭板)이다.

정조가 집권 말기인 정조 22년(1798년)에 쓴 것으로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즉 만 갈래 시내와 강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라 칭하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는 생각을 드러내 보인 현판이다.
글은 이렇다.

뭇 개울들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지만, 하늘에 있는 달은 오직 하나 뿐이다.
내가 바로 그 달이요 너희들은 개울이다.
그러니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태극, 음양오행의 이치에 합당한 일이다.

이런 뜻을 품은 정조가 이 작은 홍예교를 건너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슬퍼했을까? 지난번에 들렸던 안양 만안교가 다시 생각난다.

벌교 도마교는 광주쪽 통로

벌교에 가면 유명한 다리가 벌교 홍교와 소화다리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도 등장한다. 그리고 다리 규모는 작지만 의미 있는 다리가 또 있다. 1990년 12월 5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73호로 지정된 도마교(逃馬橋)이다.

순천시 낙안면 낙안민속마을에서 857번 지방도를 따라 벌교읍 방향으로 가다가 오른쪽에 도마교 이정표를 만난다. 벌교읍 전동리의 벌교와 광주간 도로에서 100여m 정도 초지마을 쪽으로 떨어진 전동제 저수지의 물길 위에 가로 놓여 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가면 이정표를 볼 수 없어 쉽게 다리를 찾지 못한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이 다리를 건너야 벌교에서 광주를 갈 수 있었다. 즉 벌교에서 광주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는 벌교 쪽으로도, 광주쪽으로도 갈 수 없었다.

다리는 ‘도맷다리’라고도 부르며 독(돌)다리, 도마다리라고도 한다. 벌교 사람들이 ‘절산’이라 부르는 부용산이 풍수지리에서 말할 때 ‘약마부정(躍馬浮定 : 도약하려는 말의 자세)’의 형태이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이 다리를 ‘도마교’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다리를 통해 소나 말이 건너다녔다 해서 도마교라 말했다고 한다. 그럴법하다. 다리가 반듯하게 각진 모습이 마치 부엌에서 사용하는 ‘도마’와 같은 느낌도 함께 다가왔다.

이젠 그저 농사일을 도울 뿐

다리 주변에 2기의 석비가 서 있다. ‘도마교비’와 ‘중수비’인데 그 내용을 보면 조선 인조 25년(1645)에 처음 설치되었다. 시주 명단에 현지 읍민인 정창락, 장선용 등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아 이들이 처음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숙종 8년(1682)에 새로이 보수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의 사정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다.

도마교 옆에 세워진 두 개의 비석은 본래 전동교 옆 민가 쪽에 하나가 세워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평촌마을 골목 끝 집 담벼락에 세워져 있었다. 그것을 도마교를 보수할 때 옮겨 세워놓은 것이다.

현장에서 보기에는 작은 개천 하나를 이어주는 작은 다리일 뿐이다. 도마교는 높이 1.8m, 너비 1.8m, 길이 2.3m이다. 원래 다리의 길이는 약 5.7m에 이르렀는데 1989년 홍수로 인해 절반 정도가 파손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보다는 개천이 훨씬 넓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다리는 원형이 파손되고 잔존원구만 방치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998년에야 보수를 했다. 폭우 때 나머지는 개천을 따라 쏠려나갔는데 찾을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이 다리는 농사일은 물론이고 마을 동제를 치르는 대상의 한 일부를 차지했다. 그러나 마을의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그러한 의식들이 사라져 그저 농사일을 돕는 존재로만 남아있다.

지네가 살아 움직인 듯한 형상

‘살았을 때는 진천에 살 것이요, 죽어서는 용인에 묻힐 것’이라는 뜻을 가진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는 말은 잘 알려진 속담이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김유신 장군의 고향이기도 한 충청북도 진천은 사람이 살기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은 ‘진천 농교(籠橋)’. ‘농다리’라는 이름이 더욱 정겹다. 현존하는 돌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힌다.

천년을 이어온 농다리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의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미호천)에 있다. 고려시대 몽골 침략 때 세워졌으며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다리다. 동양 최고(最古)의 돌다리로도 알려진 곳이다.

농다리는 매우 특이하게 생겼다. 선암사 입구의 승선교처럼 무지개 모양도 아니고, 벌교 도마교처럼 각진 모습도 아니다. 상판보다는 쌓아 올린 교각이 넓고 양 옆으로 튀어나온 교각의 양끝이 마치 지네의 발처럼 보인다.

‘농다리’의 ‘농’자는 해석이 분분하다. 물건을 넣어 지고 다니는 도구의 ‘농(篝)’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혹은 고려시대 임연 장군이 ‘용마(龍馬)’를 써서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에서 ‘용’자가 와전되어 ‘농’이 됐다고도 한다. 또 지네 모양을 닮았다 하여 지네 농자를 써서 농다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10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농다리는 지난 1976년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 28호로 지정됐다. 농다리는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1932년에 발행된 상산지(常山誌, 진천의 옛 지명이 상산이었다고 함)에 농다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천년의 역사를 넘어 축제로 이어져

진천 농다리는 생김새가 서로 다른 돌을 얹었지만 비바람과 홍수를 거뜬히 이겨내는 지혜가 숨어있어 천년의 세월을 견뎌냈다. 100m가 넘는다고 알려졌는데 길이 93.6m, 폭 3.6m, 두께 1.2m, 교각 사이의 폭 80㎝ 정도이다. 30㎝×40㎝ 크기의 사력암질 자석(紫石)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만들었다.

2000년부터 해마다 농다리 축제도 열린다. 농다리축제는 이같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널리 알리고 소중한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움은 물론 조상의 슬기를 배워가고자 농다리를 테마로 한 이색적 축제이다.

농다리에 대해 알리기 위해 전시관도 만들었고 다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도 만들어졌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에 속한다는 농다리는 그 유적의 깊이만으로도 한 번쯤 다녀올 만하다.

얼마 전 진천군에서는 농다리에 꽤 공을 들였다. 중부고속도로 상행선 진천 부근에 커다란 광고판을 만들어 세우고, 농다리 주변을 말끔하게 정비했다.

혹은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장희빈’, ‘모래시계’ 등 드라마 속 장면에서 이 돌다리를 한번쯤 봤을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스쳐가는 풍경이기에 사람들이 별 관심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다.

농다리를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나무데크를 설치했고, 농다리 건너편으로 언덕 너머 초평저수지까지 산책로를 닦아 놓았다. 아쉬운 것은 중부고속도로를 지나면서 바로 광고판과 다리가 보이는 데도 이곳까지 가려면 30분을 돌아가야 한다.

이젠 농다리 아름다움에 빠져도 될 듯

농다리에 도착했더니 맨 먼저 반기는 사람이 풀빵 장수 아저씨였다. 그는 귀가 안들린다고 손짓을 하는 데 풀빵 한 봉지에 2천원을 주고 샀다. 하나씩 먹으며 다리를 건넜다.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17번째이다.

또 농다리 옆 언덕 위에 농암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초평저수지의 풍경이 단풍잎과 함께 시원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농다리 초입에 농다리 전시관도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농다리만 달랑 보고 오기가 어딘지 좀 아쉬웠는데, 이 정도면 농다리를 목적지 삼아 여행을 떠나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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