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리 지역에서는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 인권신장의 차원에서 보자면 인권조례 제정은 진일보한 사회권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기 위해서 어떤 조건도, 어떤 단서도 붙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어린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장애라는 조건 때문에 차별이나 또 다른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권리를 침해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뜻이다.
과연, 학교 현실에서 아이들의 인권을 고스란히 지킬 수 있을까? 교사가 머리채를 잡힌 이번 사건은 교권의 무력을 실감하고 학생인권을 무색하게 만든 사건들 중 빙산의 일각이다. 학생들 스스로 하는 자율이 전제되지 않은 현실에서 학생인권을 교사들이 가르쳐야 한다면 산 넘어 산이다. 지나치게 이기적인 문화에 찌든 아이들의 행태를 보노라면 인권이 발목이 되어 더 이상 교육을 펼칠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 때가 많다. 그렇다고 인권조례의 숭고함을 선언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만 밀어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인권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우리는 인간이다.’가 합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딜레마다. 타인에 대한 배려, 존중이 먼저가 아니라 자기 권리의 목소리로만 이야기되는 인권이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교권은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이런 형국에 교사들이 날마다 학생들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주먹질의 샌드백이 되더라도 학교에서 강자로 분류된 이상 교사들의 인권은 거론될 수조차 될 수 없다.
인권이 보호되기 위해서는 강자이건 약자이건 모두의 노력이 공존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권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절대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 더욱 절대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인권이 상대적인 위치에 놓일 때 공유지비극에 빠지게 된다. 자유와 평등을 존중하는 사회인 이상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가 전제된 그 다음에 인권이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의 오래전 경험담이다. 학생들과 대화로 지도가 안 되면 힘으로라도 기를 꺾어야 할 때가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참교사로서 변명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몇 번씩 노력을 쏟아도 학생의 반응이 교사를 향해 완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면 정말 난감하다. 방약무인(傍若無人)한 학생들 앞에 인권의 숭고함을 흔드는 기억이 악몽처럼 되살아난다. 핵가족의 가족문화에 ‘내 멋대로’ 길들여진 아이들과 호흡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어떻게 좁혀야 할까?
이제 교사는 약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일체의 체벌금지 앞에서 교육현장은 새로운 모색을 요청받고 있다. 아이들에게 인간적으로 더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는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가자. 혁신학교의 흐름이 그 해결책일 수 있다. 뜻있는 교사들이, 일방이 아니라 쌍방향의 소통, 교사만이 아니라 학부모와 지역사회까지 한 데 결합된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고민하고 있다. 교사들의 업무를 경감시켜 더 충실한 수업, 더 따뜻한 생활지도, 더 희망찬 진로진학 상담, 더 신명나고 효율적인 행정업무 처리를 향해 내딛는 모색과 대안에 거는 기대가 간절하다. 그러한 희망이 빛고을혁신학교의 현실로 거듭날 때 인권조례만큼 필요한 교권조례도 존중될 것이다.
* 공유지의 비극 : 1968년 12월 13일자 『사이언스』에 실렸던 하딘(G. J. Hardin)의 논문에 실린 내용으로 개인주의적 사리사욕은 결국 공동체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는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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