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헤게모니(12)
연대와 헤게모니(12)
  • 이홍길 광주민주동지회회장
  • 승인 2011.08.12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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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대 교수인 김관웅은 반우파 투쟁의 시말을 서술하는 가운데 쌍백방침의 올바른 노선을 견지했더라면 “중국 공산당 중앙의 가장 중요한 결책자인 모택동의 이런 초심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중국은 그 후 많은 시행착오를 피면하고 6․70년대에 이미 민부강국의 태평성세를 이룩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흘러갔고 상처가 상흔이 되기도 전에 대약진운동의 수렁과 문화대혁명의 10년 비극이 중국인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민사랑을 구두선처럼 외쳤던 모택동이 어찌 일련의 대재앙을 연출하고 초래할 수 있었을까? 앞서 지적한바와 같이 임기응변에 능한 책략가의 한계가 제어장치가 없이 노출되어버렸다고만 하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참혹하고 파멸의 과정이 너무 질서정연하다. 비판운동․정풍운동․반우파 투쟁․대약진 운동․군중노선․뇌봉학습 운동․모택동어록 학습운동․문화대혁명 등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다른 주장들이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논리의 연쇄과정이었다.

모택동의 탁월한 개성과 우상화로 이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중국의 시간 공간의 조건과 민국시대적 경험들이 또 다른 이유를 들어내 준다. 삼민주의와 삼대정책은 손문이 창시한 국민당의 사상무기로, 손문의 계승자인 장개석이 마땅히 수습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삼민주의로 변용시켜 장개석의 철옹성을 깨뜨리는 도구로 활용하는 모택동의 책략에 혀를 내두루기도 한다.

적의 무기를 나의 무기로 활용하는 것도 물론 유격전술의 요체라 하겠다. 그런데 민권주의를 누누이 설파한 손문도 기실 그만큼은 민주주의자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어, 반우파투쟁으로 지식분자 민주세력을 씨 말리듯 탄압한 모택동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도 있어, 모택동의 반민주적 처사가 돌출행동만이 아님을 변명할 수 있게 한다.

1919년 12월 북경대학에서 있었던 여론조사에서 손문은 진독수보다 두 배나 많은 표수로 가장 위대한 지식인으로 뽑히고 있었는데, 이념적 선호도는 삼민주의보다 사회주의를 택하고 있었고 우방으로는 소련이 미국보다 네 배나 앞서고 있었다.

손문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독일이나 일본 같은 독재국가보다 발전이 덜 신속하다고 평가하고 소련 공산당원들의 기율을 부러워했다. 또 중국인은 개인적 자유를 많이 향유하여 흐트러진 모래와 같다고 불평하였다. 그가 민권을 하나의 주의로 내세워 선양하고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그의 민권주의는 선지선각자와 후지후각자에서 알 수 있듯이 엘리트주의와 서구식 정치장치의 결합일 뿐이었다.

소련을 학습한 공산주의자 모택동은 반장전쟁과 항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통일전선이 필요하였고, 그 확실한 보증을 담보하기 위해서 연합정부와 신민주주의가 필요하였다. 고도의 책략이 성공한 결과로 신중국을 탄생시켰지만 구중국의 주도계급은 정돈 또는 소멸되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사상개조나 숙반투쟁이 필연적이었다.

인민의 대부분은 노동자․농민으로 지식분자․민주파가 중요 동맹자였다 할지라도, 사회주의 중국을 위해서는 개조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인민의 구성에 있어서 극소 부분이었다. 더구나 공산당은 민주에 대한 보편적 요구도 자산계급 민주로 인식하여, 자유주의를 경계하는 의식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상 민주경험을 갖지 못한 중국에 있어서 민주는 아직 미래 가치였고, 모택동의 혁명욕구는 조급하여 당내의 민주마저 수용할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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