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헤게모니(10)
연대와 헤게모니(10)
  • 이홍길/광주민주동지회회장
  • 승인 2011.07.26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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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전남대 명예교수광주·전남 민주동지회회장
신민주주의론과 연합정부론으로 민주정파와 연대하여 신중국을 탄생시킨 중공정권하에서 민주정파와 지식인들이 대대적인 수난을 당하게 된 반우파투쟁은 납득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었고 60만에 가까운 지식인들이 갖가지 고초를 격어야 했다. 중공과 모택동은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쌍백 방침으로 지식인과 민주당파의 공산당 비판을 유도하여 “사상상의 주관주의 사업상의 관료주의 조직상의 종파주의”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쌍백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민주당파 인사들의 비판과 불만이 모택동의 기대 수준을 넘어 그의 반격을 초래하게 되었다. 1957년 5월 16일 모택동은 「당외 인사들의 비평을 대처할 데 대한 중공중앙의 지시」라는 문건을 작성, 당외 인사들이 “마음대로 말을 하게 내버려두고 잠시 반박을 하지 않음으로써 우익분자들이 저들의 반동의 몰골을 드러내게 한다.”고 지시하고 이어 상해의 모임에서는 “잡귀신들을 굴속에서 나와서 떠들어대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뱀을 굴 밖으로 끌어내는 전술로 자찬까지 했다.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부르짖고 민주당파들과 장기공존하자고 주장했던 모택동의 전술이 말갛케 드러나도 그는 여전히 위대한 중국의 최고 영도자였다. 93학사의 저안평은 연합정부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여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비판하였다. 그야말로 스스로 그물에 걸린 것이었는데 그 그물은 전 중국을 둘러싸고도 남을 만큼 크고 조밀해 지식인인 이상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1955년의 숙반운동(반동분자 숙청)의 문제점을 지적하다 우파로 몰리기도 하고 당과 역사인식 현실인식 문화인식을 달리한 까닭에 우파가 되기도 하였다. 당과 관계기관에 의하여서만 우파로 지목되어 처분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동료들의 비평을 통해서 우파로 낙인 되기도 하였다.

교육계도 반우파투쟁의 중요 지점이었다. 모택동은 4월 30일 천안문 성루에서 민주인사들과 담화하는 가운데 「학교의 당위원제가 적합하지 않으니 교무위원회나 교수회로 집중하여 고치면...」하는 말을 장백균 나융기 등이 듣고 전달한 것이 <민맹중앙공작간보> 제15기에 실렸고 고등학교내에 열렬한 호응을 유발했다.

학교의 행정공작은 행정회의가 처리하더라도 교학과 과학연구 분야는 학술위원회가 처리하고 학술위원회는 반드시 당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집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당의 영도를 약화시키려는 것은 아님을 덧붙였다. 5월 13일 민주동맹은 좌담회를 열어 <우리들의 고등학교 영도제도 건의>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 건의에서 많은 당원동지들이 당중앙의 단결․교육․지식분자개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학술기관의 특점을 알지 못하고 일반 정권기관과 동등하게 본데다 당원들의 민주작풍이 부족하여 학내의 중요조치를 군중과 상의하지 않는데다 모든 것을 당원이 처리하는 것을 당의 영도를 실현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도 한다고 지적하였다. 반우파투쟁 가운데 민맹의 건의는 비판을 받았다.

중국 인민대학 부교장은 북경시 인민대표회의에서 민맹의 건의는 반동강령으로 당과 당원에 대한 악독한 공격으로 당의 내정을 간섭하고 심지어는 공산당의 말하는 자유마저 제한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교수․교사들의 학교 자치에 대한 요구와 자기 전공에 대한 주장도 우파 낙인을 초래하게 되고 그것은 곧 사회격리를 가져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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