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헤게모니(8)
연대와 헤게모니(8)
  • 이홍길/광주민주동지회회장
  • 승인 2011.07.1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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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길/전남대 명예교수광주·전남 민주동지회회장
1949년 중국 공산당과 민주정파는 연대하여 장개석 정권을 몰아내고 중화인민 공화국을 건립하였다. 반장 통일전선의 연대를 정치협상회의로 국내외에 과시하였으나, 민주정파는 정권을 나누어 갖는 것도 아니고 재야당도 아니었다.

중공의 영도를 받아들이는 신정권의 정치적 분식 정파에 불과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신민주주의를 내세워 범민주세력의 통섭을 표방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소련을 학습하는 공산당 정권으로, 노․농 세력을 기본계급으로 사회주의국가 건립을 목표로 하는 정권이었다.

민주정파 인사들을 내각에 참여시키고 상호 감독하여 중공과 민주정파가 장기공존하자고 모택동이 격려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정치대우로 민주를 분식하는 거수기구임을 면할 수 없었다.

명목은 상호감독이지만 결국 공산당 감독만 남게 되었다.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치적 책략으로 민주정파와 통일전선을 이루었지만, 기본적으로는 항일전쟁과 반장전쟁을 통하여 획득한 공산당의 정권이었다. 건국 초기에 공산당 안에서, 물론 일부의 의견이었지만, 민주당파에게 권력을 분점 시킬 필요가 없다는 불평도 나왔다. 궁극적으로 누가 싸웠고 누가 혁명했느냐는 논공행상적 감각이었다. 게다가 무산계급적 역사의식을 가지고 민주정파를 자산계급 또는 소자산계급으로 구분하여 사상개조 되어야 할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전 중국인민의 민족적 염원과 자유․평등의 민주세상을 꿈꾸는 민주정파들의 보람과는 별도로 신중국의 건립은 공산당의 영도와 모택동사상이 이룩한 영광이었는데, 모택동사상이 반장 혁명전쟁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연안 정풍운동이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난 후에 많은 지식분자와 학생들이 공산당총부가 있는 연안으로 몰려들었다. 공산당만이 중국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도시의 비군사 생활에 습관이 된 학생들과 지식분자들의 유입은 연안 사회내부에 기율이 없고 질서가 없는 현상들을 초래하였다. 국민당과 일본의 위협에 대처해야 하는 연안 공산당의 영도 층들은 기율 있는 간부와 지식분자의 핵심을 가꿀 필요가 있었다.

사회를 변혁하기 이전에 자신들의 사상을 단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사상개조운동으로 곧 정풍운동이었다. 연안에서 상용되고 또 위신을 획득한 이 운동은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에 충분히 발전하여 특히 지식분자, 민주정파들이 그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다른 면으로는 중공의 구심력 확보의 수단이 되고 사상통제의 방법이 되기도 하였다.

1940년 초에 운동이 채용하는 방법이 이미 완비되었는데, 그 일단계는 당의 조직내를 몇 개의 소조로 나누고 그 구성원으로 하여금 지정된 문건과 강연을 학습․토론케 하되 침묵하는 자유는 없었다. 성원은 문건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고, 그의 원래의 사상과 태도는 다른 사람들의 장시간의 비판을 받아야 한다. 계속된 교육은 긴장을 초래해 심각한 정서위기를 가져와 그 개인의 내재의지를 타파하게 된다. 개인은 오직 당의 권위와 가치 관념에 투항하여 이러한 압력 하에 기왕의 죄를 속죄하게 된다.

다음 단계에서는 수차 자아비평을 하고 개인의 성격을 유린 받으면서 공산주의 교조와 관방의 노선을 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내놓고 그의 과거의 사상과 행위는 하나도 바른 것이 없었음을 표명해야 했다. 사람들은 죄가 있다는 의식 속에 해방을 획득하고 新生을 얻게 된다. 그야말로 新人이 되어 열정적으로 당의 일체 명령을 집행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 지게 된다. 이것이 이후 지식인과 민주정파가 거처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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