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콩쿨대회 깨나 뻑쩍했제”
“우리마을 콩쿨대회 깨나 뻑쩍했제”
  • 김경대 기자
  • 승인 2010.09.28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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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광산구 신가동 풍영정마을 이도윤씨

▲ 영산강 상류 변에 자리잡은 풍영정마을은 한때 광주시민들의 여름피서지로,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극락강 무시’의 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풍영정, 옛 광주 사람들 피서지로 인기
한때 ‘극락강 무시’하면 전국서 유명짜
 

영산강 상류 변에 자리 잡은 광주 광산구 신가동 풍영정(風詠亭)마을은 뒷산을 허물고 신가지구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옛 정취를 많이 잃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영산강은 한때 광주시민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았으나 반짝이던 금빛 백사장과 다슬기는 간 데 없고 4대강사업 한답시고 중장비들만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시내 사람들이 여름이믄 냇가에서 목욕하고 대사리 잡고 대단했제. 그때는 어디 갈 디가 있었간디? 사람이믄 다 제각(풍영정) 보고 몰려 들었제.”

지금은 몇 가지 물건으로 구색만 갖춰놓고 간판도 없이 ‘점빵’을 운영하고 있는 이도윤(73)씨는 “당시엔 백숙도 쪄 내고 톡톡히 재미를 봤지만 지금은 하루에 담배 2~3갑 파는 게 전부다”라고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 풍영정 정자 안에는 당대의 명필 석봉 한호가 쓴 ‘제일호산’이라는 커다란 편액이 걸려있다.
마을의 이름이 된 풍영정은 조선 명종 때 김언거 공이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여 풍류를 즐기기 위해 정각(亭閣) 12동을 영산강과 ‘새몰덕산’ 들녘이 바라다 뵈는 언덕배기에 세웠다. ‘풍영’이란 이름은 논어에 나오는 ‘風俗詠歸’의 글귀에서 따왔다.

풍영정이 지어진 지 500여년이 다 되도록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데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왜군이 풍영정에 불을 내 정각 11동이 소실되자 편액의 풍영정 세 글자가 자획마다 흩어져 물오리로 변해 영산강 물 위에 떠다니는 걸 보고 왜군장수가 그 기이함에 놀라 급히 불을 끄도록 해 화마를 면했다는 얘기가 그것.

마을은 풍영정의 역사만큼이나 유서가 깊은데 기록에 의하면 1400년대에 개성에서 이주한 광산김씨가 처음 자리를 잡아 서씨, 이씨가 대종을 이루며 살았다고 전한다.

40여 호 25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은 성품이 바르고 음전해 일대에서는 소문이 자자한 모범마을이다. 60, 70년대에는 전국을 풍미했던 ‘극락강 무시(무의 방언)’의 산지이기도 했다.

“강 가 모래밭에다 토란이여 무시를 겁나게 숨었제. 이맘 때믄 토란장시들이 겁나게 몰려들었겄네. 서울에서 극락강 무시하믄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우리마을이 ‘무시꼴짝’이여.”

이씨도 당시에는 마을에서 극락역까지 지게로 무를 져 나르며 부수입을 올렸다.
“화물차 칸까지 무시 한 푸대를 져 나르믄 얼마씩 줬제. 힘 좋은 사람은 세 푸대까지 져 나르기도 했어. 무시농사 지어서 부자된 사람들도 많았제.”

▲ 이씨는 얼굴사진만은 절대 싫다며 점빵 안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이씨의 가게 뒤로 신가지구 호반아파트가 보인다.
여름철에는 광주에서 내로라하는 피서지로, 김장철이 다가오면 무시를 팔아 재미를 보던 마을은 양산동에 연초제조창과 도살장이, 상류를 따라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강에 의지해 삶을 꾸려가던 주민들에게 이제 아무 것도 주지 못하는 강은 ‘웬수’나 다름없다.
“비만 오믄 수해지구여. 불안해서 못살아. 30년 전인가 큰물이 졌을 때 온 마을을 물이 다 덮어브렀어. 없는 사람들은 떠나고 땅께나 있는 사람들은 땅을 돋아서 집을 지었제. 어정쩡한 사람들은 대충 고쳐서 살고.”

이씨는 마을 뒤로 산이 있을 땐 비가 와도 반은 이웃마을인 ‘매결’로 흐르고 반은 풍영정 쪽으로 흘렀는데 산이 없어지고 난 후 물이 이쪽으로만 쏟아진다고 푸념했다. 그는 내친 김에 4대강사업까지를 싸잡아 못마땅해 했다.

“바람맞은 사람들이제, 냇가를 파믄 뭘해. 비 오믄 도로 메워질 짓거리를. 모래도 옛날에 건설한다고 다 파먹어버리고 없어. 마을 앞에도 전북사람이 맡아서 4대강 한다고 공사를 허등만 시방 쉬고 있어. 건설이야 일 헐 사람들이 괄괄이 몰리겄제만 중장비들만 허송세월 보내고 있드만. 배를 띄운다고? 하이고 부산서 서울까정 차로 몇 시간이믄 가분디 환장헐 일이제.” 

화제를 돌리려 곧 한가위인데 예전 마을의 한가위 풍경은 어땠느냐고 여쭸다.
“추석 때 우리 마을 콩쿨대회가 요란했제. 요 밑 공터에다 마이크 설치해서 애들 객지서 내려오믄 돈 걷어갇고 상도 주고 뻑쩍허게 했어. 근디 이웃마을인 매결, 반촌 뿐 아니라 시내 사람들도 몰려와서 술 먹고 행패부리고 밸 놈들이 다 있었어. 야튼 그때가 재미졌제.”

이씨는 마을의 인심도 예전 같지 않게 “막막해져브렀다”고 걱정했다.
“옛날엔 설이여 추석이여 우리집에서 떡국 썼응께 상 차렸응께 오소, 번갈아 오소 했는디 요즘은 장만해놓고 오라고 해도 안 가브러.”

이씨는 “하마 요맘 때 같으믄 남자 덜끼리 추석제물 산다고 양동시장에 가서 막걸리 한잔씩 걸치고 돌아올 때구만.”하며 황혼녘 노을이 비치는 영산강 너머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 풍영정에서 영산강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KTX가 흐르는 세월의 빠르기로 굉음을 내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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