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극락강 무시’하면 전국서 유명짜
영산강 상류 변에 자리 잡은 광주 광산구 신가동 풍영정(風詠亭)마을은 뒷산을 허물고 신가지구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옛 정취를 많이 잃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영산강은 한때 광주시민들의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았으나 반짝이던 금빛 백사장과 다슬기는 간 데 없고 4대강사업 한답시고 중장비들만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시내 사람들이 여름이믄 냇가에서 목욕하고 대사리 잡고 대단했제. 그때는 어디 갈 디가 있었간디? 사람이믄 다 제각(풍영정) 보고 몰려 들었제.”
지금은 몇 가지 물건으로 구색만 갖춰놓고 간판도 없이 ‘점빵’을 운영하고 있는 이도윤(73)씨는 “당시엔 백숙도 쪄 내고 톡톡히 재미를 봤지만 지금은 하루에 담배 2~3갑 파는 게 전부다”라고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마을의 이름이 된 풍영정은 조선 명종 때 김언거 공이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여 풍류를 즐기기 위해 정각(亭閣) 12동을 영산강과 ‘새몰덕산’ 들녘이 바라다 뵈는 언덕배기에 세웠다. ‘풍영’이란 이름은 논어에 나오는 ‘風俗詠歸’의 글귀에서 따왔다.
풍영정이 지어진 지 500여년이 다 되도록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데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왜군이 풍영정에 불을 내 정각 11동이 소실되자 편액의 풍영정 세 글자가 자획마다 흩어져 물오리로 변해 영산강 물 위에 떠다니는 걸 보고 왜군장수가 그 기이함에 놀라 급히 불을 끄도록 해 화마를 면했다는 얘기가 그것.
마을은 풍영정의 역사만큼이나 유서가 깊은데 기록에 의하면 1400년대에 개성에서 이주한 광산김씨가 처음 자리를 잡아 서씨, 이씨가 대종을 이루며 살았다고 전한다.
40여 호 25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은 성품이 바르고 음전해 일대에서는 소문이 자자한 모범마을이다. 60, 70년대에는 전국을 풍미했던 ‘극락강 무시(무의 방언)’의 산지이기도 했다.
“강 가 모래밭에다 토란이여 무시를 겁나게 숨었제. 이맘 때믄 토란장시들이 겁나게 몰려들었겄네. 서울에서 극락강 무시하믄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우리마을이 ‘무시꼴짝’이여.”
이씨도 당시에는 마을에서 극락역까지 지게로 무를 져 나르며 부수입을 올렸다.
“화물차 칸까지 무시 한 푸대를 져 나르믄 얼마씩 줬제. 힘 좋은 사람은 세 푸대까지 져 나르기도 했어. 무시농사 지어서 부자된 사람들도 많았제.”
강에 의지해 삶을 꾸려가던 주민들에게 이제 아무 것도 주지 못하는 강은 ‘웬수’나 다름없다.
“비만 오믄 수해지구여. 불안해서 못살아. 30년 전인가 큰물이 졌을 때 온 마을을 물이 다 덮어브렀어. 없는 사람들은 떠나고 땅께나 있는 사람들은 땅을 돋아서 집을 지었제. 어정쩡한 사람들은 대충 고쳐서 살고.”
이씨는 마을 뒤로 산이 있을 땐 비가 와도 반은 이웃마을인 ‘매결’로 흐르고 반은 풍영정 쪽으로 흘렀는데 산이 없어지고 난 후 물이 이쪽으로만 쏟아진다고 푸념했다. 그는 내친 김에 4대강사업까지를 싸잡아 못마땅해 했다.
“바람맞은 사람들이제, 냇가를 파믄 뭘해. 비 오믄 도로 메워질 짓거리를. 모래도 옛날에 건설한다고 다 파먹어버리고 없어. 마을 앞에도 전북사람이 맡아서 4대강 한다고 공사를 허등만 시방 쉬고 있어. 건설이야 일 헐 사람들이 괄괄이 몰리겄제만 중장비들만 허송세월 보내고 있드만. 배를 띄운다고? 하이고 부산서 서울까정 차로 몇 시간이믄 가분디 환장헐 일이제.”
화제를 돌리려 곧 한가위인데 예전 마을의 한가위 풍경은 어땠느냐고 여쭸다.
“추석 때 우리 마을 콩쿨대회가 요란했제. 요 밑 공터에다 마이크 설치해서 애들 객지서 내려오믄 돈 걷어갇고 상도 주고 뻑쩍허게 했어. 근디 이웃마을인 매결, 반촌 뿐 아니라 시내 사람들도 몰려와서 술 먹고 행패부리고 밸 놈들이 다 있었어. 야튼 그때가 재미졌제.”
이씨는 마을의 인심도 예전 같지 않게 “막막해져브렀다”고 걱정했다.
“옛날엔 설이여 추석이여 우리집에서 떡국 썼응께 상 차렸응께 오소, 번갈아 오소 했는디 요즘은 장만해놓고 오라고 해도 안 가브러.”
이씨는 “하마 요맘 때 같으믄 남자 덜끼리 추석제물 산다고 양동시장에 가서 막걸리 한잔씩 걸치고 돌아올 때구만.”하며 황혼녘 노을이 비치는 영산강 너머를 오래도록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