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사슴이 물을 마시는 명당
목마른 사슴이 물을 마시는 명당
  • 김경대 기자
  • 승인 2010.09.08 11: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주시 동구 월남동 녹동마을 조남수 어르신

매봉에 혼백 묻은 의병장
베드타운 조성 감감무소식

▲ 조남수씨.
평동역을 떠난 광주지하철 1호선의 반대편 종점, 광주 동구 월남동 녹동 마을.

‘녹동’이라는 이름은 제(차)일봉이라 부르는 마을 뒷산의 지형에서 유래한다. 마치 사슴이 마을을 품에 감싸고 길게 누운 형국이다. 

“우리 마을은 풍수상으로 목마른 사슴이 연못에서 물을 마신다는 갈록음수 형(渴鹿飮水形)이라고 해. 근디 예전 충장로에서 ‘ㅈ과자점’ 하던 양반이 사슴 등에다 조상 묘를 썼는디 큰 아들, 작은 아들이 죽고 쫄딱 망해부렀어. 묘도 잘 알고 써야 명당이제, 뭣이 안 맞았는가비여.”

마을 회관 앞 담 그늘 밑에서 부인과 바람을 쐬고 있던 조남수(75) 어르신의 말이다.

풍수 서적을 뒤져보니 갈록음수 형 명당은 모두 혈 앞에 연못이 있어야 발복을 한다고 쓰여 있다. 만약 연못이 없으면 대신 못을 파 주어야 한단다.

“마을 근처 어디에도 샘이 없어. 물이 귀했제. 지하수를 파드라도 안 좋고. 화순 가는 큰 도로까지 나가 냇가에서 질어다 묵었당게. 마을에 불도 많이 났어. 물이 없응께 끄도 못허고.”

60여 가구 250여 명의 주민들이 사는 녹동마을은 김씨, 임씨, 신씨 3개 성씨가 일찍이 터를 잡았다. 마을 앞뒤로는 방벽처럼 둘러 선 산들이 짙은 녹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저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매봉이여. 행주 기씨들 선산이제. 그 오른쪽으로 찐죽허니 높은 거는 부엉산. 광산 김씨 산이고. 왼쪽으로가 무등산 집게봉. 마을 뒤로는 제일봉, 그 너메가 분적산 그래. 여그는 광주하고 기온이 1~2도 더 차가와. 공기 좋고 교통 편허고 살기는 참 좋아.”

▲ 천안 전씨 열부비 뒤로 마을을 감싸고 있는 제일봉이 보인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마시고 있는 갈록음수 형 지형이다.
병아리를 노리고 하늘에서 내려꽂히는 듯한 인상의 매봉에는 의병장 기의헌(奇義獻)에 관한 얘기가 전한다. 조선중기 학자였던 그는 정묘(1627)·병자(1636) 양 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의병을 모아 인조가 머무르던 남한산성으로 출병하였으나 청주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성립된 걸 알고, 호를 기은(棄隱)으로 고친 뒤 죽을 때까지 은거했다. 마을 복판에는 그를 기리는 재실인 담숙재(湛肅齋)가 있다.

“옛 어른들 말로는 매봉에다 그 냥반 혼백을 묻었다 해, 초혼장이라고.”

▲ 의병장 기의헌을 기리는 담숙재.
부엉산과 매봉에는 5·18과 관련한 아픈 역사도 묻어있다.
“계엄군이 거그서 진을 치고 지나는 시민들에게 총을 쐈어. 살벌했어. 우리 마을 사람도 죽든 안했는디 총에 맞고 그랬어. 피난민들이 무서운께 큰길로 못가고 마을 안길로 지내가고 했제.”

농경시대 때는 마을의 당산인 은행나무와 큰길가의 숫소나무, 마을 안쪽의 암소나무에게 ‘천룡지신, 지룡지신’이라 빌며 당산제를 거하게 지냈다.

“고것이 영판 재미난디, 걸궁도 치고. 망주(은행나무 앞에 세워진 작은 선돌)에 감는 줄도 창고에 여적 있어. 근디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할라고를 해야제.”

조 어르신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시절이 그렇게 속절없이 묻히는 게 안타까웠는지 ‘요즘 젊은 것들’을 원망했다.

산업화로 농업의 미래가 불투명해진 까닭도 있겠지만 용산 마을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용산차량기지가 들어설 무렵부터다. 

“차량기지 들어선 데가 다 논이었어. 주민들 반대가 많았제. 보상도 째까주고 땅을 다 수용해 가분께.”

녹동역은 주민들 불만을 무마시키려고 설치된 간이역으로 처음 개통 때는 2~3시간 간격으로 다니던 것이 요즘은 그나마 50분 남짓으로 줄었다.

“30분 간격만 되도 좋겄는디 탈 주민들이 얼마 없어서 미안헌께 헐 말이 없어. 시에다 건의도 해봤는디 차도 증차해야 되고 인원도 배치해야 허고 쉬운 일은 아니등마.”

▲ 마을의 당산나무 구실을 하는 은행나무 바로 앞이 광주지하철1호선의 종점인 녹동역 출입구다.
주변 일대의 90%가 아직 그린벨트로 묶여 있는 월남동(행정동으로는 지원2동)은 2006년 주택단지 개발사업(일명 베드타운) 계획이 발표되면서 또 한 차례 홍역을 겪었다.         

“쬐까 더 얹어준닥 헝께 외지인들에게 다 폴아부렀제. 한 번 둘러보소. 보상 받을라고 나무들 많이 안 심어놨는가. 농사 수지가 안 맞응께 글겄제만서도 어느 세월에 개발되겄능가. 글 안해도 빈 아파트가 겁나단디.”

해가 제일봉 너머로 넘어가자 마을에는 긴 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잠깐의 소란 뒤에 사슴 품에 파묻힌 마을은 곧 깊은 적요에 잠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