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 없어도 합은 잘 되야”
“가진 것 없어도 합은 잘 되야”
  • 김경대 기자
  • 승인 2010.09.02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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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서구 서창동 북촌마을 정복순 할머니

북을 닮았다 하여 북촌
아직도 비만 오면 고생
  

▲ 정복순 할머니.
서남대병원을 지나 엘지자이 아파트 쪽으로 꺾어 들면 북촌마을이 나타난다. 광주 서구 서창동 북촌(北村)마을은 광송 간 도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신도심 상무지구와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곳이다.

한쪽은 광주광역시청사를 중심으로 금융·유흥시설이 밀집된 신흥지구인데 반해 다른 한쪽은 백석산(98m)을 배산(背山)으로 올망졸망한 주택들이 모여 있는 미개발 지역이다.

북촌마을은 마을지형이 농악기 중 하나인 북과 비슷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그것이 한자로 기록되면서 북촌(北村)으로 굳어졌다.

마을은 고려 말인 14세기 무렵에 광산김씨 3형제가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해 그 후손들이 600여 년간을 이어 살아온 유서 깊은 터전이다. 그러나 최근 백석산 중턱을 비집고 우후죽순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마을 규모가 상당부분 줄어들었다.

북촌 경로당에서 만난 정복순(79) 할머니는 전남 나주에서 살다가 50여 년 전에 마을로 이주해 와 지금껏 살고 있는 산 증인.

“막 이사 올 때만 해도 험상궂은 반디였제. 명 잔(짧은) 사람은 다 여가 붙어 있었응께. 이 일대가 공동묘지였다는 말이여. 근디 사람들은 꽤 살았어. 산 밑으로 집들이 빽빽했응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시절에 마을 주민들의 살림살이는 곤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논은 높제 길은 좁제 거그다 비만 오믄 마을이 물구렁이 되얐어. 집이라고 변변했간디? 새막(표준어-새를 쫓기 위해 논밭 가에 지은 막.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을 뜻하는 듯) 같이로 지어갖고 포도시 비바람이나 피했제.”

지대가 낮은 탓에 50여년이 지났어도 아직까지 주민들은 비만 내리면 안절부절이다.

“비가 싸게 오믄 하수도가 금방 분수처럼 치솟아. 마을 가운데로 똘(또랑)이 큰 놈이 지난께 큰 비가 오믄 집 안방까정 물이 차오르곤 해. 포장도 최근에 되서 그렇제 질도 얼매나 험상궂었는디. 오늘도 비온께 방에다 걸레를 깔아놓고 나오는 길이랑게. 아이고 징해.”

주민들이 주로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곳은 마을 인근에 있던 임업 시험장이었다.
“아이고, 키 작고 약헌 놈은 일도 허라고 안해. 한 사흘 허고 아프다고 안 나가믄 바로 잘려.”

1895년까지 광주군 군분(軍盆)면으로 분류됐던 이 일대는 이름의 내력처럼 1951년 초급간부를 양성하는 군사교육시설인 상무대와 육군기갑학교가 들어섰는데 근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마을 주변의 환경도 급속히 변화한다. 

“마을 앞으로 상이군촌이 있었는디 군인들 먹다 남은 음식쓰레기로 돼지를 키웠제. 종축장이라고들 불렀는디 난중에 집 지어서 딴디로 이주시켜 줬어. 종축장이 떠남시로 이홍기씨라는 양반이 그 터를 인수해 미나리깡을 했제. 우리마을 사람들도 품께나 팔았제만.”

▲ 최근 들어 마을 뒤편으로 아파트 장벽이 둘러섰다. 북촌 경로당은 홀로 된 할머니들이 의지가지 지내는 유일한 안식처다.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던 마을은 군사교육시설이 들어서면서 국도변 가까이에 신기마을이 새로 생기고는 지금껏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다 최근 마을 중심부에 2개의 교회와 오피스텔도 새로 들어서고 전망 좋고 공기 맑은 산자락에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주변부 딱지를 떼게 됐다. 

한때는 70여 호까지 살다가 지금은 40여 호 남짓 남아있는 마을은 풍족하진 않았지만 우애만큼은 그 어느 마을 못지않았다.

“밑바닥 돈이 없어 그렇제 주민들 합이 잘되는 것은 자랑할 만 해. 서로 없이 산께 틀어잡고 ‘집이는 어쩝디여’ 걱정해주고 뭣 쬐그만 것이라도 생기믄 노나먹을 줄 알고.”

마을 경로당은 남자 어르신들이 많이 작고한 탓에 할머니들 ‘천국’이었다. 경로당에 들어서자 10원짜리 화투를 치고 계시던 한 할머니에게 정 할머니가 농을 건넨다.

“여그 이 냥반이 자네 중신 서 준다고 안 왔능가”라고 수작을 걸자 “아이고, 난 되았네. 영감이라믄 아조 지긋지긋 혀. 끄니 때마다 밥 안 차려줘도 되고 혼자가 이리 편헌디, 중신은 무슨.” 할머니들은 맞장구를 치며 그렇게 또 한바탕 웃는다.

“마을에 돈이 없응께 경로당도 세를 들어 살아. 그래도 쌀은 달달이 나온 게 낮밥은 꼭 해잡수라고 하제. 반찬이야 보지란만 하믄 천지가 널렸응께. 찬 없는 밥이어도 여럿이 먹응게 꿀맛이여.”

손님이 왔다고 커피 한 잔을 타 건네주던 할머니가 팽팽했던 한 시절 얘기를 꺼내든다.

“아짐씨들끼리 한복 입고 백석굴(골)에 있는 절(운천사)로 놀러가곤 했어. 거그가 돌부처가 있었거든. 그 때만해도 백석굴 사방이 산중이었제. 장구도 치고 술도 한 잔썩 하고. 세월이 화살이여.”

▲ 할머니들이 돌부처라 부르는 운천사 마애여래좌상. 고려시대 석굴불상으로 광주시 유형문화제 제4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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