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까진 몰라도 피난지로는 최고”
“명당까진 몰라도 피난지로는 최고”
  • 김경대 기자
  • 승인 2010.08.27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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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북구 장등동 장등마을 정규택 할아버지

장등괘벽, 금계포란  명당지
200여 가구 600여 주민 거주

▲ 정규택 할아버지.
광주 북구 장등동 장등마을을 찾아가는 길이다.

동광주IC에서 국립5·18국립묘지 방향으로 가다 왼편 버스종점 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이런 곳에 마을이 있을까 싶게 외진 소로 길이 이어진다. 한전 신광주전력소와 이북5도민 망향동산을 지나자 고만고만한 산 밑으로 널찍이 자리 잡은 장등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 모정인 삼락정(三樂亭)에서 쉬고 있던 주민 한 분이 “광주사람 중에 우리 마을 못 와 보고 죽은 사람들 많을 거야.”하며 기자를 반긴다.

19세기 말 광주군 하대곡면에 속해있던 마을은 이후 광산군에 편입돼 장운동, 석곡동으로 왔다갔다하다 장등(長燈), 장동(長東), 용호(龍虎)를 합쳐 장등동으로 분리됐다.

‘장등’이라는 마을이름은 풍수지리학 상 ‘벽에 긴 등을 달아 놓은 형상’이라는 ‘장등괘벽(長燈掛壁)’ 형 명당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마을 둘레에 100m 남짓한 크고 작은 산들이 있는데 이 때문에 긴 등성이 밑이라 하여 장등(長嶝)이라 불렸다는 얘기가 전한다.

마을이름에 ‘등(燈)’자가 들어 있어서인지 1986년에는 한국전력변전소가 마을입구에 자리 잡아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또 마을경로당 옆에 세워질 예정인 마을 유래비에는 ‘東으로는 토끼봉 西로는 삼각산 능선이 겹겹 골을 이루고 있어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금계포란(金鷄抱卵) 형에 마을이 안착했다’고 적혀있어 예사 명당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 마을 경로당 옆에 세워질 예정인 마을 유래비. 마을에 얽힌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적은 유래비는 그 규모가 남달라 주민들의 지극한 마을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6·25때를 비롯해 숱한 환난에도 마을에 죽은 사람이 없어. 인공 때는 경찰들도 우리 마을로 피난을 오고 그랬제. 명당은 잘 모르겠고 우리 마을은 피난지로는 딱이었제.” 위로부터 6대째 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정규택(80) 할아버지의 말이다.

정 할아버지는 “명당이라고 별 게 있겠느냐”며 “노인들이 보통 80~100살까지 살고 밥 안굶고 살았으면 그것이 명당”이라고 정의했다. 

200여 가구 6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장등마을은 얼추 입촌의 역사가 500여년을 훌쩍 넘는다. 경주 정씨, 파평 윤씨, 청주 한씨, 제주 고씨 등이 입촌조로 정착해 지금은 여러 성씨가 복합촌을 이루며 오손 도손 모여살고 있다.

“마을이 하도 큰께 일제시대 때 둘로 갈랐어. 장등하고 장동하고. 그래도 워낙 인심이 좋고 헌게 우아래 마을 간 경쟁심 이런 거 없이 우애 좋게 잘 지내.”

▲ 동으로는 토끼봉 서로는 삼각산 능선이 겹겹을 이루는 금계포란 형 길지에 자리잡은 장등마을은 6.25와 같은 큰 환란도 아무런 피해 없이 비켜간 피난지다.
장등마을과 바로 붙어있는 장동마을 주민들은 가장골, 아래샘골, 지막골, 노쩍골, 쇠목골 등 산과 산 사이 골짜기에 개간한 땅을 부지런히 일구면서 평온하게 지내왔다.

“펜야 쌀 농사제. 벌도 좀 치고 소도 키우고. 젊어서는 부락에서 울력으로 화전도 일구고 했제만은 요샌 젊은 사람들이 없응께 밭농사는 뜸해. 남자들은 많이 죽고 없고 할머니들이 많애.”

방학이라 학생들이 학교를 쉬는 터라 요즘은 40~50분마다 한 대씩 다닌다는 47번 버스는 마을슈퍼 앞에서 5분 남짓 쉬더니 주민 서너 명을 싣고 마을을 떠났다.

“교통이 조금 불편하긴 하제만은 버스 없을 때는 말바우 시장까지 걸어 다니고 그랬어. 지금은 좋은 시상 사는 것이제. 글고 젊은 사람들은 다 차가 있고 헝께 불편한지 모리고 살아.”

마을 안쪽으로는 ‘탑골’이라 불리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에는 고려 초기에 세워졌다는 절터 얘기가 남아있다. 5층 석탑과 석조여래좌상 등이 탑골에 남아있었는데 1982년 땅 주인의 신고로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이러한 마을의 소소한 역사는 2003년 7월 마을주민 윤주천씨와 김종옥씨에 의해 조사돼 마을 모정 삼락정에 현판으로 쓰여 걸려있다. 새로 세워질 마을 유래비 또한 그 규모가 남달라 주민들의 마을사랑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장등마을 인근에 들어선 한전 변전소 덕에 주변 야산에는 높은 고압송전철탑이 종횡으로 얼크러져 지나면서 미관이 어지러워 보였는데 변전소와 관련된 얘기는 없는지 여쭈었다.

“정부시책으로 하는 공익사업이라 주민들이 별 말이 없었제. 근디 고압선 때문에 땅을 살라는 사람도 없고 땅금도 싸고 좋은 일은 없었어”하며 심드렁해 하신다.

마을 앞으로 지나는 긴 수로에는 연일 내린 비로 인해 노란 흙탕물이 콸콸거리며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꾸라지며 송사리 같은 물고기가 숱하게 잡혔어. 근디 구청으로부터 보조를 받아 지은 양옥들이 들어서면서 정화조 때문에 씨가 말랐어. 물이 예전만큼 깨끗하지가 못하단 소리제. 그래도 우리마을만한 곳이 없어. 경치 좋고 공기 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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