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몰’하믄 알아주는 부자마을이었제”
“‘새몰’하믄 알아주는 부자마을이었제”
  • 김경대 기자
  • 승인 2010.08.18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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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서구 유덕동 유촌마을 박해진 할아버지

농경 중심지…새말·초분골로도 불려
이질적 산업화의 그늘, 소외감 깊어

▲ 유촌마을의 모정 낙유정. 극락면과 유촌에서 한글자씩을 땄다. 극락면소재지가 있었던 유촌은 광주천을 따라 버드나무가 열지어 늘어서 있어 그리 불렸다.
“새몰덕산에 가면 언제나 김이 무럭무럭 난다고 했제. 그 만큼 살림살이가 풍족했다는 뜻이여. 하지만 지금은 찬바람만 쌩쌩 불어.”

‘새몰덕산’은 각각 ‘유촌’과 ‘덕흥’의 옛 이름인데 예전의 명성은 온데간데없이 시대에 뒤쳐지고 말았다는 광주 서구 유덕동의 처지를 빗댄 촌로들의 푸념이다.

유촌(柳村)마을 모정인 낙유정(樂柳亭)에서 불볕더위를 피해 모여 있던 촌로들은 기자의 방문에 지난 영화의 덧없음과 그로 인한 서글픔을 하소연하듯 되뇌었다.

“여기 들이 얼마나 넓었는가 하믄 무등경기장부터 양동시장 다 가도록 모다 논이었어. 위로는 전대 정문까정 닿았고 아래로는 서창들녘까지 이어졌으니 끝이 안 보였제. 한마디로 호남평야 곡창지대의 중심이었어. 안보, 고보, 새보, 뒷보 등 보만 해도 13보가 있었응께 말 다했제.”

▲ 박해진 옹.
그중 가장 연장자인 박해진(81) 할아버지가 풍요로웠던 시절의 한 자락을 들춰냈다. 그러자 옆 노인들이 맞장구를 놓았다. “그럼그럼, ‘새몰’ 하면 광주에서 젤 알아주는 부자마을이었제. 동운동, 상무동 사람들도 전부 다 이리 와서 밥 얻어먹고 살았어. 하다못해 거지들도 모다 우리마을서 멕여 살렸응께.”

‘높은몰’, ‘서처골’, ‘상멕기’, ‘새암정지’ 등 마을에서 여직 통용되는 수두룩한 옛 지명도 알찼던 시절의 한 때를 가늠할 수 있는 일단의 징표들이다.   

김해김씨, 하동김씨, 하남정씨가 400여 년 전 처음 터를 닦은 마을은 한창 때는 ‘500여 대촌’이라 불렸다. 지금도 마을은 300여 가구가 넘게 모여 산다. 하지만 그 넓던 농토는 85% 이상이 외지인들 손에 넘어갔고 대부분의 주민들도 객지사람들로 바뀌었다.

새마을, 새몰, 새말, 신촌(新村)으로도 불리던 마을은 인근 노인들 사이에서는 때로 ‘초분골(草墳谷)’이라는 명칭으로 더 친숙했다.

낙유정 자리에는 팽나무, 왕버들, 느티나무 등 10여 그루의 풍치림(風致林)이 조성돼 있는데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죽으면 이곳 나뭇가지에 송장을 걸쳐놓고 짚더미로 덮는 초분 장례가 마을에서 성행했다고 한다.

“대낮에도 이 근처로는 얼씬을 못했어. 애기들 죽으믄 묻는 애장터에 상여집도 있었제. 초분이 없어진 후로 최근까지도 그랬어.”

박 할아버지는 덕분에 초분골에 수령이 350년 된 팽나무가 있었어도 꺼림칙한 기운 때문에 당산제를 지내지 않았다고 했다.

▲ 주민센터 앞마당에 놓여있는 석조여래좌상. 당산을 대신한 마을 아낙들의 신앙의 대상이었다.
대신 마을 아낙들이 치성을 드린 대상은 다름 아닌 석조여래좌상.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이 불상은 70, 80년대까지 마을의 수호신으로 기능했다.

“원래 불상이 있던 곳은 상무동 방죽 너머 백석골 ‘진심사’라는 절이었어. 옛 어르신들 말로는 큰 절은 아니고 암자 수준의 절이었다고 하는데 절이 먼께 주민들이 마을로 옮겨왔다고 하등마. 동네 아낙들이 아기라도 낳을라치믄 지극정성으로 치성을 드리고 그랬제.”

유덕동주민센터 앞마당에 놓여있는 불상은 비바람에 닳아 모습은 비록 무뎌지고 희미해졌지만 알듯 모를 듯한 미소는 그대로 간직한 채였다.

그렇다면 달이 기울 듯 마을의 쇠락이 시작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주민들은 마을의 발전을 견인할 큰 인물이 오래도록 없었던 것이 주원인이라고 했으나 백 할아버지는 더 근본적인데서 원인을 찾았다.

“예전엔 말 자리나 하는 사람들이 숱했어. 근디 일제시대 때 덕흥마을에서 ‘뒷보’를 판다고 또랑을 파냄서 ‘대무산(山)’의 혈을 건드렸제. 시뻘건 피가 며칠 동안이나 또랑으로 흘러내렸다고 하등만. 그 뒤로 쓸 만한 마을사람들이 다 요절을 하고 인재가 안 나. 지금껏 덕흥, 유촌 사이가 안 좋은 것이 다 그 때문이여.”

젊은 사람들이 들으면 ‘믿거나 말거나’한 얘기지만 그런 얘기가 또 있다.

“상무대가 일제시대 때는 비행장이었어. 지금으로 말하자믄 시청 앞에서 광-송간 도로까지가 활주로였던 셈이제. 날개 둘 달린 비행기(쌍엽기)를 보겠다고 전국 사방에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어. 대단했제.”

하지만 지금은 위생처리장과 상무소각장, 비행기 소음의 직간접적인 영향권 내에 있으면서도 별 다른 혜택을 보지 못하고 농경시대 중심에서 산업사회의 변방으로 남겨졌다는 자괴감만 주민들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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