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노동자대회 참가기
남북노동자대회 참가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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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밤
승선예정시간을 여섯시간이나 넘기고 드디어 배에 올랐다.
통일원 관계자로부터 방북 교육을 받은 후 드디어 출발.
정신을 좀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유명한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TV에서 봤던 민주노총관계자들도 보이고 날개옷 안 입은 희망새 식구들도 보이고.

밤 11시. 저 멀리 고성항(북에서는 장전항을 고성항이라고 부른다) 불빛이 보인다.
배에 오른지 이제 겨우 3시간정도 지났을 뿐인데 벌써 도착하다니. 정말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데 오기가 이렇게 힘들었구나.

갑자기 갑판 위에서 노랫소리가 들린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다들 흥에 겨워 부르는 노래였다.
예정보다 늦게 도착해 그 날 일정이 취소되어 내리지 못하고 배에서 자야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광주사람들은 자지 않고 모여서 술자리를 가졌는데, 짧은 순간 우리 옆을 스쳐 가는 두 사람. 북쪽 세관관리 한 명과 정무원 한 명이었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던 술자리가 갑자기 영화 속 한 장면이 된 듯한 아득함.
아...우리가 북녘 땅에 오긴 왔구나!!


5월 1일 아침 8시.

행사장소인 김정숙 여사 휴양소에 도착했는데 북쪽 노동자들은 벌써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간의 어색함도 잠시. 깃발을 흔들며 '환영'을 외치는 북쪽 노동자들 사이로 '감사'로 답하며 입장했다. 이게 정말 꿈이 아닐까. 바로 내 눈앞에 북녘동포들이 서 있다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우리랑 전혀 다르지 않는 사람들.
북쪽 노동자들은 모두 하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모자만 벗으면 누가 남쪽 사람이고 누가 북쪽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닮아있었다. 유일하게 하얀 모자만이 우리를 구별하고 있었다. 슬픈 흰 모자.

북쪽 직총 산하 철도여성 취주악단의 행진을 시작으로 단일기가 올라가고 행사가 시작됐다.
행사장 뒤쪽에서는 접대원 아가씨들이 우리를 위해 음료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비가 와서 많이 추웠는데 얇은 한복을 입고 있길래 춥지 않냐고 물었더니 생긋 웃으며 "일 없습네다" 하는 게 아닌가.
남남북녀라더니 정말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로 예뻤다. 쑥스러워서 같이 사진 찍자는 얘기를 못했는데...

오전 행사가 끝나고 직총에서 준비한 점심을 먹었다. 예쁜 도시락에 정성스럽게 담겨있는 밥과 반찬들.우리를 위해서 준비했을 걸 생각하니 하나도 남길 수가 없었다.
남은 반찬들은 싸가지고 가서 안주해야지. 마음이 통했는지 다들 남은 음식들을 싸고 있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김치가 없어서 밥 먹기가 조금 팍팍했다. 남에서는 김치를 안 먹는다고 생각한 걸까.

점심을 먹고 나서 광주식구들이 밥보다도 먼저 챙겨온 룡성맥주를 한잔씩 했다. 여기 맥주보다 약간 달고 더 진한 것 같았다. 알고 보니 15도란다. 많이 마셨는데 큰일이군.

오후에는 남과 북 노동자들이 두 팀으로 나눠서 축구경기를 했다. 응원할 때는 남과 북 구별 없이 앉았는데 내 바로 옆에 앉은 분은 김정숙여사 휴양소를 관리하는 35살의 리광용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결혼해서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단다.
개인적인 얘기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사회상황 등에 대해 얘기할 때는 서로 조심하는 모습이 가슴이 아파서 내가 "많이 조심스럽지요?" 하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중에 세대주(남편)하고 같이 꼭 다시 오란다. 정말 그럴 수 있었으면...

축구경기가 끝나고 남북노동자연환모임(합동공연)을 본 뒤 남과 북 노동자들이 조국통일, 자주단합을 외치며 하나로 어우러졌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일정에도 없는 내용이었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됐다. 이렇게 쉬운 것을...
행사가 모두 끝나고 우리를 배웅하러 양옆에 길게 서 있는 북쪽노동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나오는데 다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행사장을 나온 우리는 그곳을 다시 들어갈 수도, 북쪽노동자들은 우리 쪽으로 다가올 수도 없었다.
도대체 왜 우리는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가.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하루다.

마지막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금강산엘 올랐다.
금강산 가는 길에 보이는 끊어진 경의선, 드문드문 서있는 인민군 병사, 양쪽으로 쳐져있는 철조망. 이런 슬픈 모습 뒤로 보이는 눈에 익은 모습들. 일터로 향하는 노동자들, 가방 메고 학교 가는 학생들, 엄마 등에 업혀있는 아이들...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비가 조금씩 내려 뿌연 안개가 낀 금강산은, 남쪽의 어느 산보다 너무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하지만 그 감동도 어제 만난 북녘동포들에게서 느낀 감동보다 더하진 못했다. 정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웠다.

금강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건물들이 페인트칠이 전혀 안되어 있는 게 이상해서 우리를 안내한 현대직원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페인트에서 나오는 기름에 의한 환경파괴를 막기 위해서란다. 그럼 차의 엔진을 미리 켜놓지 않은 이유도 이것이었구나.
금강산에 쓰레기 하나, 담배꽁초 하나 없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온정각에서 점심을 먹고 마지막으로 북쪽 세관을 통과해서 배로 돌아왔다.
오후2시 30분 배가 고성항을 출발했다. 점점 더 멀어지는 고성항.
오후6시 15분 속초에 도착. 북녘동포들과의 2박 3일이 이렇게 지나갔다.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건만 아직도 꿈이 아니었나 싶다. 나에게 딸기단물을 따라주던 접대원 아가씨, 세대주와 꼭 다시 오라던 관리원, 기차놀이하다 힘들어 손을 놓치니 바로 손을 잡아주시던 초로의 아버님.
지금도 그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온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던 사람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졌던 2박3일이었다.

/오정아씨는 광산구 송정동에서 소망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약사로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대표로 5월1일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노동자대회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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