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내 고향
다시 찾은 내 고향
  • 김경대 기자
  • 승인 2010.05.13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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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동구 용산동 찬샘마을 김재원씨

주암댐에 잠긴 고향 떠나 부평초로 떠돌아
교통 좋고 공기 맑아…시내부자 안 부러워
  

▲ 찬샘마을에는 달랑 네 가구가 모여 산다. 마을이름은 용천사라는 절 밑에 있던 ‘찬샘’에서 유래했는데 한 여름에도 얼음물 같은 샘물이 솟던 유명한 피서지였다. 지금은 아쉽게도 광주천 개발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광주 지하철 1호선은 광산구 평동역을 출발해 반대편 종점인 동구 녹동역에 닿는다. 일과를 마친 전동차는 용산기지사업소에서 고단한 몸을 누인다. 찬샘마을은 전동차가 숨 가쁜 호흡을 마침내 고르고 쉬는 조용한 골짜기에 위치해있다. 마을은 지금껏 소개해온 중 가장 작은 달랑 네 가구가 전부다.

이곳 찬샘마을의 터줏대감을 자처하는 김재원(66)씨는 1982년에 마을에 정착한 나름 ‘입촌조’다. 제주에서 8년여를 살다가 광주로 흘러들어오면서 첫 마음이 꽂혔다. 김씨는 86년 화순광업소에 들어가 2006년 3월 광부로 정년 했다.

김 씨가 애초 아무 연고도 없는 찬샘마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실향의 아픔 때문이었다. 그의 원래 고향은 전남 보성군 문덕면 봉갑리 새터 마을. 주암댐에 잠겨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고향을 생각하면 아직도 전국 팔도를 헤매 다녀야했던 자신의 부평초 팔자 생각이 나 코끝이 매워온다.

▲ 김재원씨.
그는 고향을 떠나 전국을 헤매면서 안 해 본 일이 거의 없다. 젊어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무슨 일이든 한 번 보면 뚝딱 따라했다. 그 덕에 어느 땐 이발사로 목수로 미장이로 보일러공으로 광부로, 기술자가 필요하다고 하면 무슨 일이든 잘 한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어도 자칭 ‘만물박사’란다.

“돈 벌기가 수월하다는 소릴 듣고 무작정 제주로 건너갔는데 외지사람에게는 방을 내주지 않는 거예요. 이곳저곳을 헤매다 고향 사람을 우연히 만나 과수원 집 쪽방에 간신히 살림을 부렸지요. 고향 사람 아니었으면 영락없이 길거리에 나앉을 판이었어요. 그래서 고향, 고향 하는가 봅니다.”

그는 제주에서 고향 사람들의 소개로 방도 얻고 일자리도 구했다.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5·16도로 포장공사에 그도 목수 일로 한 몫 거들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돈을 모아 정착한 곳이 이곳 찬샘마을.

“우연히 이곳을 찾았는데 보성과도 가깝고 고향의 산과 들과 어찌나 비슷하던지요. 지인들이 광주 시내에 땅을 사지 그러냐고 한사코 만류했지만 마음이 동하질 않는 걸 어떡해요. 당시에 100여 평을 평당 4만2천 원씩 주고 샀는데 시내 땅값이랑 엇비슷했지요. 지금도 잘한 선택이다 싶어요.”

이웃이라곤 제과점 주인, 개인택시 운전사, 나머지 한 집은 절집 보살님으로 이들 모두 찬샘마을에 대한 애정과 찬양은 차고 넘친다.

“예전에 요 아래 ‘용천사’ 밑에 ‘찬샘’이라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 일대를 ‘물통골’이라 불렀는데 어찌나 물이 찬지 한 여름에도 잠깐 발목 담그기가 쉽지 않았대요. 지금은 광주천을 넓힌다고 개발하면서 샘이 말라버리고 말았지만 예전엔 참 좋은 곳이었어요.”

산 좋고 물 맑은 찬샘마을은 교통 편리한 광주 근교이면서 1급수 공기를 제공하는 초특급 주거 환경을 갖추고 있다.

광부 생활을 하면서 얻은 진폐증, 이명증세로 산재보상을 받을 만큼 몸이 축났지만 이곳 아침 공기 덕분에 하루하루가 즐겁다.

간간이 뒷산을 찾는 등산객들 쉬어가라고 직접 작은 나무평상을 짜고 그 옆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10년이면 키가 훌쩍 자라는 느티나무는 그가 죽고 나서라도 후손들에게 할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씨와 고향사랑의 뜻을 전해 줄 것이다. 

그의 집 앞 마당에는 엄나무, 보리수, 앵두 등 마치 수몰된 고향 마을에서 옮겨다 심었을 법한 추억의 나무들이 한창 봄 순을 틔워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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