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만난 친구, 20년 후의 약속
20년 만에 만난 친구, 20년 후의 약속
  • 시민의소리
  • 승인 2008.07.1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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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등룡(광주비정규직센터 소장)

그 해 6월은 축제로 시작되었다. 우리가 다니던 학교는 개교기념일이 6월초라서 밤꽃향기가 날 때쯤이면 3박4일 동안 축제를 했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쉬고 즐기는 축제라는 말 대신에 함께 어깨 걸고 나가자는 결의의 뜻으로 ‘대동제(大同祭)’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고 서울에서는 6월 10일 백만 대중이 시청 앞 광장에 모여서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학교를 삼삼오오 몰래 빠져 나와 양동시장, 대인동 터미널 앞 광장, 다시 계림시장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식으로 광주 시내를 몇 바퀴 돌고 나서야 학교로 돌아왔다.

백만 명이 모인 서울의 정세를 볼 때 아직 광주는 시민들의 참여가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후 1주일 동안 낮에는 시민들을 만나고, 저녁에는 늦게까지 집집마다 홍보물을 돌리고, 새벽까지 화염병을 만들고 나서야 잠이 드는 강행군을 하였다.

20년 전 친구, 촛불 들고 만나 

그러자 마침내 6월 20일을 넘어서면서 광주시민들이 직접 거리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서울과 부산과 대구에서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난다는 소문이 돌면서 광주시민들의 참여는 참으로 놀랄 정도로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때 어떤 아저씨께 왜 부산시민들보다 늦게 나오셨냐고 묻자 그분은 “다 우리도 생각이 있어서 그랬어”라는 짧은 한마디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0년 5월의 외로웠던 상처 때문에 주저했고, 서울시민과 부산시민들을 보고 뭉쳤던 마음이 확 풀렸기 때문이고, 이제 한판 해볼만 하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난 학생과 시민들은 하나가 되어 7년 만에 다시 해방광주를 만들어 갔다. 서슬 퍼렇던 전두환 군사깡패도 다시는 군대를 동원할 생각은 꿈도 못꾸고 마침내 6월 29일, 전두환 군사독재는 국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그렇게 승리했다. 

변하지 않은 민주주의 신념과 약속

 그 후 20년이 흘렀다. 그리고 지난 6월 우리는 촛불광장에서 다시 만났다. 화염병 대신에 촛불을 들고, 혼자가 아닌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만났다.

어린 중고등학생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라도, “왜 아빠는 촛불집회 안가냐”는 아이들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서로 연락도 못한 채 살아 왔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진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막걸리 한 잔을 나누며오래도록 의견을 나누었다. 이미 2MB정권은 더 이상 정책추진력을 잃은 식물정권이 되었고, 민중이 승리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결코 경계를 늦출 수 없고 더 크고 완전한 승리를 위해 약속했다. 이제 집집마다 미국산 쇠고기 안 먹는다는 깃발을 내걸고 내 직장의 식당과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우리 동네의 식당과 쇠고기 판매점 앞에서도 촛불을 들고 국민들을 설득하자고. 그것이 이기는 길이라고.

그래서 그 힘으로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꿈꾸어온 세상을 이제는 하나씩 이루어 보자고. 이 아이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당당하고 자랑스런 나라를 물려주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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