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저질러진 봄날의 금요일
모든 게 저질러진 봄날의 금요일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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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저질러진 봄날의 금요일>


1980년 5월 23일은 금요일이었다. 무장한 시민군들이 전남 지역 전체로 빠져나가 광주에서의 양민 학살을 고발하고, 시군 별로 거센 항쟁의 불길이 솟구친 날이다.

워매, 강옥이, 배가 이상하네, 배가,
음, 으으으흠, 내 배를, 흑! 지나갔어,
뜨거운, 숙명, 어떤 일생이, 무쟈게 큰, 죄악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를 통과,
통과, 관통했네, 강옥이,
글고, 양현이,
손 한번, 잡세,
왜 이리, 먼가, 자네들, 화약의 손들, 내가,
저 빛 터지는 창으로, 내가,
완전 연소된 삶으로, 막 빠져나가려 하네,
내 몸은 지금, 연기, 냉갈 같네, 자네들이,
무장무장, 멀리 보여,

(중략)

황지우의 시, '윤상원'의 앞부분이다.

어떤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누구나 몸 안의 언어를 사용한다. 평소에는 표준말을 사용하던 사람도, 뜻밖의 사태에 직면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불쑥 내뱉는 말, 고향의 말이다. 그랬을 것이다. 총알이 몸에 박혔을 때, 윤상원이 처음으로 뱉은 말은, '워매'라는 한마디였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전라도말(사투리) 사용을 옹호하는 입장이지만, 십여 년 전 서울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사투리에 대해 거부감이 많았다. 그 당시 전라도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내게 이로울 것이 없었다. 오히려 해로울 뿐이었다.

1986년부터 공장 생활을 했던 나는, 내가 왜 하필 전라도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 고생이 많았다.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내 입에서 전라도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얼굴색이 변하던 사람들. '전라도 사람 중에는 범죄자가 많아.' '전라도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어.' 하는 말들을 들으며, '왜 전라도 사람 전체를 두고 욕을 하느냐.'고 따지면, '당신도 전라도 사람이라 어쩔 수 없군.' 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대답을 듣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던 시절.

미팅에 갔을 때, 내 고향이 전라도라는 말에 소개해준 친구를 눈흘겨 바라보던 아가씨. 왜 이력서에는 본적을 적어야 하는지. 돈을 써서 본적을 바꾸었던 주위 사람들. 언론매체에 등장했던 파렴치범들은 왜 한결같이 전라도 사람들인지. 그랬다.

80년대는 편견이라는 유령의 놀음에 눈먼 시절이었다. 그 유령의 장난에 나도 눈이 멀어 괜히 경상도 말씨를 쓰는 사람을 만나면 인상을 쓰곤 하였다. 말에 대한 편견은 맹목적인 광신도의 의식 같은 것이어서, 지방 출신들이 서울에서 원활히 살기 위해서는 표준말을 빨리 배워야 했다.

거의 완벽한 표준말을 구사했던 내가, 다시 전라도 말을 쓰게 된 것은 군대시절이었다. 그것도 이등병 시절 이유 없이 폭행을 당했을 때, 느닷없이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워매'라는 한마디였다.

1980년 5월 27일. 빤히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나선 시민군의 한사람이었던 윤상원. 결국 그가 계엄군의 총에 맞고 쓰러지면서 던진 말. 그것은 '워매' 라는 단말마, 몸안의 말이었다.
'워매, 강옥이, 배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5월 23일, 모든 게 저질러진 1980년 5월 23일 금요일. 21년전 그날이 떠오른다.

'모래의 시간들 /회오리 회오리 떠밀려 다니고 //꽃들이 피어나네 고름 찬 음부 같은 /총알도 썩어버릴 지독한 화농 /모든 게 저질러진 봄날의 금요일 (졸시, '모래의 금요일1' 2연 부분)

모든 게 저질러졌던 봄날의 금요일이었다. 아픈 금요일이다.

꼭 저라고 귓구녘 찢어 질것몬양
대포 소리가 들렸재 그랬재
소나기맨키로 총알이 쏟아짐서
사람이건 짐성이건 모사같이
쬐깐해져 부렀재 그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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